꽃을 떨군 어느 한 수녀의 이야기 ver. [1]


읽으면서 듣기 좋은 BGM 추천해요! 전 이거 들으면서 글 쓰니까 집중 진짜 잘 되더라고요..
소설 내용이랑 은근 찰떡!!
https://youtu.be/r5QrJ23lxt8
카페에 올린거라 설명이 반말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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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스름하게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오고 있었다.
흐린 날을 보아하니 저녁 즈음 비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수녀가 내부를 밝히고자 불이 타오르고 있는 촛대를 들고 성당으로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 구석진 곳에 자리한 문. 수녀가 거주하는 방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저 멀리 무릎을 꿇은 채 반듯한 자세로 기도를 하고 있는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수녀는 방해가 될세라 뒤꿈치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조용히 성당 내부에 있는 초에 붉을 밝혀갔다. 어두워져 가던 공간이 촛불로 인하여 밝아지자 이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지막 촛불을 남겨두고, 불을 밝히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었다.
"오늘도 열심이시군요."
멈칫, 등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여자가 옮기던 발을 멈추며 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 향하자 기도를 하고 있던 남자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여자도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수녀의 대답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옷매무새를 말끔히 정리하며 남자가 물어왔다. 수녀는 남자가 할 일도 적지 않은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괜히 잡 일에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기에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신부님께서도 할 일이 많으신걸요."
정중하게 거절하자 신부는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간 그는 걷혀있던 커튼을 풀었다. 남자의 행동에 놀란 수녀는 신부에게 다가가 난처한 얼굴로 본인이 하겠다며 말렸으나 그는
"이 정도 일은 언제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의 말에 수녀는 더 이상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동안 수녀가 봐왔던 신부는, 자신이 뱉은 말을 항상 지켜왔다.
더 이상 말려도 계속해서 그가 자신을 도울 것을 알았다.
신부의 모습에 속으로 이 정도 호의는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했다.
"··그럼 성당 안 커튼을 푸는 일만 도와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수녀의 말에 신부가 화답하듯 답했다. 친절한 모습에 수녀는 부드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흠칫, 수녀는 본인의 미소가 보일세라 서둘러 뒤를 돌아 하나 남은 촛대로 걸어갔다. 보았을까..? 아니야 바로 고개를 돌렸으니,, 고개를 내저으며 침착하게 하나 남은 촛대에 불을 켰다.
뒤를 돌아보니 자리를 이동하며 커튼을 푸는 신부의 모습에 불안한 생각하지 말자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수녀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고자 성배에 성수를 따랐다. 성배에 차오르는 성수를 보자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느낌에 고른 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차오른 성수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양손을 들어 깍지를 껴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이윽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부는 좀 전의 수녀처럼 기도를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
붉게 저물어 가던 해가 어느덧 모습을 감추었다. 수녀는 사람들이 편히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놓인 길게 이어진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가졌다. 성당 안은 밝게 타오르는 촛불에 의해 내부를 비춰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촛불을 멍 때리며 바라보다 천장을 향해 눈을 올렸다.
천장 가운데에 금으로 만든 것 같은 세련된 샹들리에가 보였다. 거기서 조금 더 옆으로 눈길을 돌리자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아름답게 세공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달이 밝게 빛나면 천장 창문에 달린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알록달록한 색의 빛이 들어와 성당의 내부는 아름다워지겠지.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수녀님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래, 바로 당신의 눈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벽안이 마치 잘 세공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추는 빛 같았다. 어찌 저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신께서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을 그에게 내려준 것이 아닐까? 수녀는 생각 없이 신부의 눈을 뚫어질세라 바라보았다.
"(-) 수녀님?"
아.., 신부의 부름에 멍 때리던 정신을 차린 수녀는 이내 그를 빤히 바라봤다는 자각에 얼굴이 홧홧해 지는 느낌이었다. 어두운 성당 안, 희미한 촛불 사이로 붉어져 가는 저의 얼굴이 그에게 보이기라도 할까. 괜스레 얼굴이 더 붉어지기 전에 마주치던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땅으로 두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이 꽤나 차디차 보였다. 눈을 피했다는 게 너무 티가 났을까, 다시 시선을 천천히 올려 신부의 목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최대한 시선을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 죄송합니다 신부님.. 질문이 무엇이었나요?"
"같이 식사 괜찮냐고 물었습니다. 혹,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건가요?"
수녀가 멍 때리고 있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신부가 걱정 섞인 말로 되물었다. 수녀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음을 한껏 긴장시킨 채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긴장을 하여 벽을 조금 세우며 말했다. (-)의 말을 들은 신부는 바로 답하였으나 문득 수녀를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가 생각났다. ..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 딱딱하게 말한 걸까? 신부님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신부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조금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정적도 빨리 끝나길 바랐다. 수녀는 빠르게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 싶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녁식사는 오늘은 좀 피곤하여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전 괜찮으니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행히도, 여전히 다정한 그의 말투에 수녀는 속으로 안도했다. 눈을 감고 웃어 보이며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인사하며 답했다.
"이해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방에 들어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수녀가 고개 숙이자, 신부도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로 짧게 저녁 인사를 마친 뒤, 수녀가 먼저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 또각또각 낮은 굽 소리가 멀어지다가 이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신부는 대화했던 자리에 서서 그녀가 본인의 방에 들어가는 것까지 바라보다, 맞은편에 자리한 자신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마음이 심연처럼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알고 지낸 지 어느새 2년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있었다. 방에 들어온 수녀는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침대에 앉아 무릎을 가슴에 기대었다.
사람 한 명이 사용하기에는 어딘가 방이 넓은 방이었다. 붉어졌던 뺨은 다행히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빠르게 식어갔다. 날이 갈수록 신부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더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지금의 신부님에게 마음이 생겼을 때를 생각하려면, 자신이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때로 기억을 거슬러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한참 전, 그러니까 수녀가 여덟 살일 적이었다. 수녀가 나고 자란 곳은 변두리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제국에서도 한참은 동떨어져 있는 끝 쪽이었다. 이 마을은 그리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하여 풍요롭지도 않은 곳이었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어린아이를 두고 젊은 부부가 먹고살기 위하여 산에 올랐으며, 한참이나 늦은 저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쉬지 않고 산에 오르던 부부이기에 길을 잃었을 리는 만무했다. 홀로 집안에 남겨져 불안에 떨던 작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과 매주 방문했던 성당, 어드정도 나이가 있는 자상한 헤럴드 신부님께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 밖엔 없었다.
성당은 마을보다 조금 언덕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길을 아이 혼자 밤늦게 올랐다. 성당으로 가는 길은 나무가 에워싸고 있었으며, 도착하여 본 신성한 성당의 외부는 어딘가 음산해 보였다. 아이는 묘한 공포감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며 굳게 닫혀있는 거대한 한쪽 문을 두 손으로 열었다.
끼이익 소리와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보인 내부는, 외부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일렁이는 노란 촛불이 벽에 걸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도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수녀들과, 그 사이 중심에 있는 자상한 헤럴드 신부님의 얼굴이 보였다.
헤럴드 신부가 얼굴을 알아보고 여자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이는 참았던 눈물이 끝끝내 터졌다. 으앙 소리와 함께 약간의 당황한 표정을 지은 신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신부의 옷깃을 꼬옥 잡고 흐려진 목소리와 입 짧은 혀로 엄마 아빠가 산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연신 울어댔다. 아이의 말을 듣고 신부는 아이를 제 품에 안아들었으며, 수녀들과 같이 마을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몇몇의 건장한 남자들과 신부가 등불과 횃불을 들고, 아이가 말한 토대로 부부가 자주 오르던 산 방향 쪽으로 무리 지어 올라갔다. 한 수녀의 품에 꼬옥 안겨 훌쩍인지도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저 멀리서 아이의 부모를 찾았다며 소리치는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토닥이던 수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저 멀리서 뛰어오는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은 거친 숨이었다. 아이 앞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아이가 바라본 신부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어딘가 슬픔이 그득했다.
아이의 부모는 다행히 찾았다. 아이가 말했던 산길에서 좀 더 동떨어진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곳에서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이미 생명은 차갑게 꺼져있었다. 게다가 두 시신의 상태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참옥했다.
산짐승에게 당한 것인지 살점이 너덜너덜했으며 복부의 내장 훼손이 심했다. 헤럴드 신부는 부모의 상태를 이 어린아이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살 만큼 산 제가 보기에도 버티기 힘든 것을 이리도 작고, 여린 어린아이가. 부모의 마지막 모습을 본 아이가 서럽게 울부짖을 모습이 너무나 눈앞에 선했다. 안타깝지 않은가. 헤럴드 신부가 이내 눈썹을 찡그리다가 큰 손으로 아이의 작은 손을 잡으며, 목멘 음성을 힘들게 쥐어짜냈다.
"··다행히 부모님을 찾았단다."
부모를 찾았단 말에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밝아지는 아이의 얼굴에 사실을 말할 생각을 하니 한평생 신과 남을 위해 돕고 산 본인이 한순간에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이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수는··,
"..다만 슬프게도 신께서 네 부모님을 일찍 별로 만드신 것 같구나."
차마 산짐승에게 당했다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신부는 사실보단, 이 아이가 받을 상처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아이의 멘탈은 신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 연약하고 깨지기 쉬웠다. 아이의 동공이 커지고 이내 숨이 가빠졌다.
신부가 돌려 말하였으나 눈치 빠른 아이는 신부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짧은 생 평생을 같이 지냈던 다정한 부모가 한순간에 저의 곁을 떠났다. 점점 새파랗게 질려가는 아이의 얼굴에 흠칫 한 신부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이는 졸도했다.
✧❅✟❅✧
부모의 장례는 아이가 졸도한 후 바로 행해졌다. 신부가 아이에게 부모의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고 의견을 낸 탓이기도 했다. 이에 수긍한 몇몇 마을 사람들도 빠르게 장례를 치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바삐 몸을 움직였다. 장례가 빠르게 끝난 후 아이는 하루 만에 눈을 떴으며, 후에 신부는 아이의 손을 잡고는 부모의 묘지에 데려다주었다.
묘지에 가만히 서서 굳은 표정을 지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신부는 아이의 부모가 사망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어쩌다 돌아가시게 된 건지는 아이도 알아야 했으니까. 고른 땅 위에 곱게 깎인 묘비 두 개가 있었다. 아이는 그 앞에 서서 고작 여덟 살 어린아이가 지을 표정이 아닌.., 너무나도 허무하고, 저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단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울지도,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신부는 그 표정에 가슴이 미어져 무릎을 꿇고 제 품에 아이를 끌어안았다. 신부가 아이의 주변인을 알아본 결과, 이 마을에서 남은 핏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친가와 외가 쪽의 몇몇 사람들은 수도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확인되며, 그 외의 사람들은 이미 이승을 떠난 지 오래였다. 품에 안겨 미동도 없는 이 아이는 작은 마을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마을은 풍요롭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척박하지도 않았다. 마을이 작아 아이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게 빠르게 퍼졌으며, 집에 혼자 있을 아이를 위해 몇몇 어른들은 생활에 필요한 용품이나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아이 혼자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긴 힘드니까. 작은 배려였다.
그리고 아이보다 네 살이 더 많은 나이브 수베다르 라는 남자아이도 홀로 있는 여자아이의 집으로 자주 찾아가 주었다. 굶었을 여자아이의 끼니를 챙겨주었으며, 말이 많고 밝은 성격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으나 정이 많은 아이였다. 아이끼리 서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과 수베다르의 부모의 사이가 가까워 나고 자랐을 때부터 서로 얼굴을 자주 보았을 뿐. 친하진 않았으나 자주 보았던 얼굴이니 만큼 걱정이 되기라도 한 것인지 하루를 마다하지 않고 매번 찾아갔다.
사람들의 도움에 다행히 아이는 전보다 괜찮아졌으나, 아직 관심과 보살핌이 더 필요한 아이일 뿐이었다. 헤럴드 신부는 그 이후로 기도를 하거나 그 외의 일을 할 때도 아이가 눈에 밟혔으며, 하루 이틀 그리 지내다 어느 날은 열댓 명의 수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의논을 하였다. 그 아이를 데려와도 괜찮은지. 처음엔 꺼려 하는 분위기였으나 헤럴드 신부의 잦은 설득 끝에 이해심 많은 수녀들은 성당으로 데려와도 좋다고 수긍하였다.
신부가 혼자 있을 아이에게 찾아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다면 성당에서 같이 지낼 것을 권했고. 이 집은 처분하지 않을 예정이며, 후에 혼자 일어설 나이가 되면 이곳으로 돌아와도 괜찮다고 말했다. 아이는 부모가 그렇게 떠난 이후 외로웠다. 어두운 밤마다 홀로 이곳에서 남아있는 게 사무치게 쓸쓸했기에 아이는 신부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 이후 아이는 성당에서 신부와 수녀, 자주 이곳에 들려 저를 만나주는 나이브 덕에 외롭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여덟 살이었던 아이는 열네 살 소녀로 성장했다. 열네 살 여름 어느 날, 소녀는 수녀가 되겠다고 말해 신부가 극구 반대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라 말하였으나, 소녀는 이곳에서 지내며 부모를 잃었던 상처가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마을로 가게 되면 그때가 생각날 것 같기도 했고, 이미 이곳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는 이미 신부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수녀들은 어머니 혹은, 언니처럼 따랐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 사람들의 곁을 떠나고 싶진 않았다. 이 일로 (-)은 나이브에게 고민을 한번 털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묵묵히 옆에서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던 그는 마지막에
"넌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도 돼."
라고 말했다. 수녀는 짧지만 굵은 그의 말에는 저를 응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았다. 그의 말에 마음이 굳어진 수녀는 가을, 그리고 겨울 동안 헤럴드 신부를 설득했다. 소녀의 무한 설득 끝에 이기지 못한 헤럴드 신부는 결국 수락을 하였고, 소녀는 결국엔 열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수녀가 되었다.
앞으로 행복한 나날만을 보낼 것 같았다. 이곳의 진정한 가족이 되었음에 마음 한편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불행은 급작스레 덮쳤다. 행복한 일만 있을 것 같던 열다섯 초여름이었다. 볼일이 있어 신부님께서 낮에 마을을 내려간 후로 돌아오질 않았다.
밤이 늦어가는 시간이었고, 왜인지 모를 여덟 살의 그날이 생각나 소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몇몇 수녀들도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으며,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던 수녀는 발을 옮겼다. 왜인지 모를 초초한 느낌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등불을 들고 굳게 닫혀있는 성당의 문을 열자 제 눈앞의 보이는 풍경이 믿기지 않아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헤, 헤럴드 신부님··!"
소녀가 들고 있던 등불을 내려놓고 뛰었다.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신부가 쓰려져 있었다. 소녀의 비명소리에 수녀들이 밖으로 나왔다.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신부를 끌어안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신부의 입에서 피가 속절없이 흐르는 모습에 소녀는 사고 회로가 멈추는 기분이었다. 산짐승인가? 부모님 때처럼.., 급히 신부의 몸 상태를 살폈으나, 산짐승이나 공격을 당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놀란 나머지 수녀들도 급히 달려왔다.
"··아아., 신.. 부님 정신, 정신 차리세요!!"
입술이 바르르 떨려 발음이 샜다. 마을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어째서.., 왜?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며 그때처럼 숨이 가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소녀가 정신 차리라며 소리치자 미약하게 숨을 쉬어가던 신부가 닫혀있던 눈꺼풀을 겨우 올렸다. 흐렸던 시선이 점차 선명해지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소녀의 얼굴이 선했다. 새파랗게 질린 것이 마치 여덟 살 그때의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이곳을, 떠나.. 렴.."
소녀의 얼굴을 담은 두 눈동자가 점차 다시 흐려졌다. 소녀는 왈칵 목이 메어왔다. 신부의 얼굴을 감싸니 당장이라도 미약하게 쉬고 있는 숨마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신부님.."
"··악.., 가.. 당장··"
흐려지던 눈동자가 이내 초점을 잃었다. 더 이상 헤럴드 신부님이 숨을 쉬지 않는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신부님..?"
"수.., 수녀님들 뭔가 이상해요. 신부님이 숨, 숨을 안 쉬..,"
곁에 있던 수녀들에게 흐려지는 말로 대답하자 몇몇의 수녀들은 신부를 다급하게 불렀고, 몇몇은 입을 막고 울기 시작했다. 아니야.. 소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며 눈동자 위로 눈물이 멍울멍울 차올랐다.
"아니야..,"
가슴이 저며오는 느낌에 신부의 이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꾹꾹 눌러두었던 설움이 북받치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열다섯 살 초여름 소녀는 자신의 두 번째 부모를 잃었다. 신부의 장례는 성당 안에서 이뤄졌다. 커다란 관 안에 신부가 곱게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었다. 피를 토하던 입은 깨끗이 닦여 있었으며, 흑이 잔뜩 묻어있던 신부복은 다른 깔끔한 신부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관 안은 수많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관 앞에서 기도를 하는 수녀들은 돌아가며 헤럴드 신부의 가슴 위로 백합꽃을 두었다. 머지않아 소녀의 차례가 다가오고, 관 앞에서 한참을 멍 때리던 소녀는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잠을 자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손을 뻗어 신부의 손을 잡았다. 흠칫, 사후경직으로 인해 손이 뻣뻣했다. 그리고 차디찼다.
이미 빨갛게 충혈된 눈에선 더 이상 흐를 눈물도 없었다. 신부님의 품에서 푸른색 손수건을 보았을 때 졸도 직전까지 울어댔었다. 이미 몸 안에 수분을 다 쥐어짜내며 목 놓아 울어서 그런지 목도 컬컬했다. 신부의 손을 마지막으로 쓰다듬고는 가슴 위에 정갈하게 백합을 두고 난 후. 자리로 돌아가 다른 수녀처럼 기도했다. 신께서 그동안 성실히 살아온 맑은 영혼을 구원해 주길 바랐다. 부디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헤럴드 신부님께서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십사 빌었다. 신부의 관은 소녀의 부모님의 묘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묻혔다.
..헤럴드 신부님께서 그리 떠나시고 난 후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어릴 적 부모를 잃었을 때처럼. 매일같이 나이브가 찾아와 서글피 울어대는 수녀를 묵묵히 위로해 주었다. 신부님께서 그리되고 난 후 옆에서 나이브가 봐온 그녀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툭 치면 사르르 퍼지며 무너질 것 같은 말라버린 모래성. 그러하기에 제 감정은 밟아 죽이고 우선적으로 그녀를 위했다.
"··미안.."
"네가 미안할게 뭐 있다고."
미안하다는 수녀의 말에 나이브의 손가락 끝이 괜히 움찔거렸다. 당황은 하였으나 다행히 얼굴에 티가 나진 않았다. 그 말은 네가 아니라 내가 더.., 나이브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원하던 꿈이 없었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라 그런지 소소했고, 욕심 또한 없었다. 이루고자 싶던 것도 또한 없었다. ..그랬으나 1년 전 제 옆의 소녀의 행동으로 인하여 꼭 이루고자 하는 꿈이 생겼다.
✧❅✟❅✧
(-)이 수녀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제국의 수도 근처에서 축제가 열렸으며, 그 행사의 수많은 상인 중엔 나이브의 아버지도 속해있었다. 마을에서 필요한 도구를 파는 사람이었으나 손재주가 좋던 그의 아버지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기 좋은 무기들을 자주 만들었다. 사람을 해칠 정도의 물건은 아니나,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기 딱 좋은 정도였다.
정교하고 단단한 디테일에 마을 사람들이 잠시 호기심을 가졌으나 그뿐이었다. 변두리 작은 시골 마을은 도둑이 드나들지도 않았고, 그 흔한 내부 싸움 또한 일어난 적이 없었다. 쓸만한 물건이긴 하였으나 마을엔 필요치 않은 도구였고, 그 때문에 고민을 하던 나이브의 아버지는 아쉬운 마음에 1년 뒤에 열릴 축제에 상품으로 팔면 어떨까란 생각을 하곤 감정을 위해 수도로 칼과 함께 편지를 부친적이 있다.
다행히 사람을 해칠 용도가 아닌, 제국의 여성들도 가지고 다니기 쉬울만한 호신용 칼은 상인 품목에 등록되었다. 그때부터 나이브의 아버지는 저와 함께할 동료들을 모았고, 마을 여성들의 추가적인 의견을 수집하여 모양을 예쁘게 다듬고 칠했다. 그렇게 수도의 축제가 열리기 며칠 전에야 그간 만들어 두었던 칼을 큰 상자에 가득 담고, 수도에 잠시 머물 준비를 끝내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와 같이 따라가야 했던 사람 중엔 나이브 수베다르도 포함이었다. 아버지의 일을 돕는 일이기에 당연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소문은 금세 퍼졌고, 평소처럼 나이브가 성당으로 찾아와 소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생각난 듯 수녀가 입을 열었다.
"나이브. 아버지 따라 수도로 다녀온다던데. 맞아?"
"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이브 본인은 사실 따라갈 마음이 없었으나,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며 계속해서 강요하는 아버지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수락했을 뿐이다.
"부럽다. 수도는 어떤 느낌일까.. 시골하고는 많이 다르겠지?"
호기심이 그득 담긴 목소리가 나이브의 귓가에 퍼졌다. 당연할지도 몰랐다. 저나, 그녀나.. 수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이곳과는 다르게 수도는 화려하고, 밤에도 호화로운 불빛들로 인하여 밝다고 들었으니. 그녀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이곳 사람들도 호기심을 가지기엔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 수도에 다녀오고 나서 이곳과는 어떻게 다른지 말해줄 수 있어?"
"궁금하면 차라리 같이 가지 그래"
"··응?"
흠칫. 나이브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부모를 잃고 나서부터 어린 동생이라 생각해 왔다. 수도의 풍경을 말할 때마다 자꾸 떼도 못 써보고 소중한 걸 양보하는 어린아이의 표정과 같아서. 그게 좀 안쓰러워 보여서 나온 말이었다.
"··아니, 네가 너무 가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우리 부모님이야 내가 말하면 허락은 해줄 거야."
"아냐 그래도.., 민폐니까."
순간적으로 (-)의 눈빛이 반짝였으나 그 반짝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으나 부모를 잃고서 자연스레 더 눈치가 많아지는가 싶더니 이른 나이에 소녀는 행동거지가 너무나도 어른스러웠다. 그는 그런 소녀를 보며 조금 더 어리광 부려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 가지고 민폐라니, 우리 부모님이 들으면 섭섭해하실걸. 아님 그간 날 못 믿은 건가?"
"무슨..! 뭔 소리야 그런 뜻 아니란 거 알잖아!"
나이브가 바라본 소녀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억울하단 듯 인상을 쓰며 약간 치켜새운 눈썹이 조금은 귀엽다 생각했다. 나이브는 표정 변화 없이 (-)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알아. 나나 우리 부모님은 괜찮으니 별 걱정 하지 말란 소리야. 넌 신부님한테 허락이나 맞도록 해. 그분이 허락을 해줘야 갈 수 있으니까"
"그.., 응.."
소녀는 다시 거절하려다가 관두었다. 항상 저를 위해 주던 나이브이니 이 정도는 그의 말을 믿어도 별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나이브의 부모는 둘째치고, 헤럴드 신부는 다행히 처음 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에게 흔쾌히 수락했다. 나이브나 그 아이의 부모님이나 충분히 믿을 수 있는 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해 한단 것에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수도의 축제가 열리기 3일 전. 수베다르의 부모와 두 명의 동료, 나이브와 (-)이 수도에 떠나기 위해 마차 두 대를 빌렸다. 한 마차는 어른들끼리 탑승했으며 나머지 한 마차는 나이브와 (-), 그리고 축제 때 사용할 소품과 호신용 칼들이 들어있는 큰 상자를 함께 실었다.
원래는 어른들과 같이 탈 예정이었으나, 빌린 마차가 작은 마차이었기에. 어른 네 명이 한 마차에 타니 자리가 꽉 차버렸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 한 마차, 한쪽에 같이 타고 짐상자를 반대쪽에 올려둘 수밖에 없었다. 마차를 처음 탄 소녀의 표정은 기대감이 그득했다. 티를 내진 않아도 잔뜩 기대감이 부풀어 있는 (-)을 보자니 나이브는 설득하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마차가 달린 지도 세 시간이 지나자 나이브는 슬슬 지루해짐을 느꼈다. 눈동자를 굴려 (-) 쪽을 보니 질리지도 않는지 창밖을 계속해서 구경했다. 길게 물결치며 흩뜨려진 머리카락이 마차의 흔들림에 작게 찰랑거렸다. 그것을 잠시 지켜보다 창문에 손을 올려두고 턱을 괴었다.
축제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기간은 4일. 그리고 마을에서 수도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3일이었다. 축제 기간이 일주일이었으며, 저녁이 되면 인근 마을 숙박업소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나이브는 마차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조금 빠르게 흐르려나. 눈꺼풀을 스르륵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몇 초, 몇 분, 몇 시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은 모르겠으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브"
"?"
한참을 바뀌어 가던 배경의 창밖만 뚫어지라 바라보던 소녀는 나이브의 이름을 불렀다. 나이브가 그녀의 부름에 괴고 있던 턱을 반대쪽으로 돌리자 소녀역시 나이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동공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3초 정도가 지나자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보이던 소녀는 답했다.
"고마워"
··별로."
저를 같이 데려와 주었음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별것도 아닌 일에 소녀가 이리도 감사하다 할 줄은 몰랐으나 어딘가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소녀는 나이브의 대답에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이브 또한 턱을 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끝나 드디어 수도에 도착했다. 저녁마다 마을 숙박업소에 들려 뒤늦은 식사를 했고, 여자가 머물 방과 남자가 머물 방 따로 나누어져 각자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이 오면 바로 출발에 나섰고, 그것이 이틀은 더 반복되다가 수도에 다 다를 때 즈음 점점 화려해 지 풍경에 소녀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빼곡했던 시골 마을과는 다르게 수도는 무엇이든 다 화려했다. 바닥엔 깔끔한 보도블록이 깔려 있었으며, 축제를 위해 하늘엔 알록달록한 모양으로 다듬은 천들이 매달려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난 후에야 축제가 시작되면 얼마나 더 화려해 질까 기대감에 소녀는 단잠을 설쳤다.
다음 날이 되자 나팔을 부는 소리와 함께 축제의 서막이 열렸다. (-)과 나이브는 낮 동안 어른들의 장사를 도왔다. 호신용 칼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보니 남성보단 여성 주민들이 더 흥미를 가졌다. 입담이 돌고 사람이 하나둘 몰려지자 장사가 예상보다 바빠졌다.
축제 기간 동안 쉴 틈 없이 일하자 6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어른들의 장사를 돕다 보니 한 번도 축제 거리를 돌아다녀 보지도 못하였다. 다행히 6일째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좀 줄어들었으며, 다행히도 축제날 마지막 날엔 아이들은 놀고 와도 된다는 어른들의 허락이 떨어져서야 (-)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아침 일찍 날이 밝자마자 소녀는 홀로 축제 거리를 나섰다. 전날 나이브에게 같이 돌아다닐 것을 권했으나 축제에 별 흥미가 없던 그는 거절했다. 소녀는 아쉽긴 하였으나 혼자 돌아니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축제가 일주일간 지속되다 보니 거리의 사람이 좀 줄었으나, 여전히 북적거렸다.
한편 잠에서 깬 나이브는 속이 초초했다. 괜히 혼자 보낸 걸까. 거리에 사람도 많은데 홀로 돌아다닐 소녀를 생각하니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괜히 거절을 해서 할 일이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옷을 갈아입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 녀석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나이브 역시 밖으로 나섰다.
대략 20분 정도 돌아다녔을까. 홀로 다른 상인의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두 눈동자를 매우 깜빡이며, 신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뭘 보는가 싶어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아, 나이브? 방에서 쉰다고 하지 않았어? 왜 나온 거야?"
"..그냥. 손수건 보고 있는 건가?"
나이브는 말을 대충 얼버무리며 소녀가 신중하게 보고 있던 물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것에 관심 없는 나이브의 눈에도 고급 진 원단이었다. 꽤나 값이 나가 보일 것 같은데.
"응. 신부님께 선물해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
"돈은?"
돈이란 말에 수녀는 자신의 안쪽 주머니를 뒤져 한 주머니를 꺼내곤 펼쳤다. 동화도 아닌 은화 5개. 꽤나 큰돈이었다. 은화 20개 값이 금화 한 개이니. 은화 한 개당 네 가족이 이틀간은 고기를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값이었다. 이돈을 어디서 난 것이냐는 표정을 나이브가 짓자 그 표정을 읽어낸 (-) 이 질문하기도 전에 답했다.
"신부님께서 수도로 떠나기 전에 주셨어. 사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고 오라 하시면서.."
"··처음엔 보내주시는 것도 감사해서 거절했는데, 신부님께서 내가 떠나기 전에 안쪽 주머니에다가 넣어두셨는지.. 나중에 보니까 들어 있더라고"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신부님께 드릴 손수건 고르고 있었어."
소녀가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추궁해서 물으려던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줄줄이 말하니 나이브는 당황했다. 좀 친절하게 물을 것을 그랬나 생각하며 입을 닫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집중해서 손수건을 고르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나이브는 옆에 서서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청년. 저 아가씨랑 아는 사이야?"
"··예."
안쪽에서 덩치 큰 중년 남자가 걸어 나오며 물었다. 나이브가 맞다 말하자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저 아가씨 언제부터 와서 손수건을 고르고 있는지 알아?"
"하하! 벌써 한 시간이야. 소중한 사람에게 줄 선물인지 하루 종일 여기에 서서 고민을 하고 있더라니까?"
"··오래 지났군요."
한 시간이라는 남성의 말에 나이브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한 시간 동안 제자리에 서있으면 다리가 아플 법 했을 텐데 (-)은 그런 기색 따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헤럴드 신부님이 소녀에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나이브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저씨, 이걸로 주세요."
한 시간 동안 고민을 하다 드디어 결정을 했는지 열심히 고른 손수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이브가 시선을 굴려 살펴보니 상당히 고와 보이는 재질의 푸른 면에, 은색 실로 손수 문양을 넣은 것 같은 자수였다. 화려하나, 그렇다고 너무 어수선하지 않은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오~ 아가씨 보는 눈이 있는구먼! 이 손수건은 사실, 이 제국과 정 반대에 있는 나라에서 겨우 들어온 귀한 거거든!"
"제국의 정 반대의 있는 나라.. 정말요?"
"그으럼! 이런 귀한 것을 알아보다니! 기분이다. 원래 은화 네 개값인데 말이야?! 귀한 것을 알아본 어여쁜 아가씨니 은화 두 개값으로 쳐줄게! 어때?"
"저야 그러면 좋죠. 정말 감사합니다."
(-)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며 일렁였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인 것 마냥 그리 웃어 보였다. 그 화사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 하니 나이브는 가슴 한쪽이 알싸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요 근래 일주일간 힘들어서 그런 것인가 싶어 그냥 넘겼다.
덩치 큰 호탕한 상인은 손수건의 포장을 서비스로 해주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손재주가 좋았던 것인지, 포장은 섬세하고 심플했다. 그것을 품에 소중히 안은 (-)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 소녀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나이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선물도 다 골랐는데 이제 뭐 할 거야?"
"이제? 음.., 사실 신부님 드릴 선물 고르면서 구경하다 몇몇 개 음식을 봤는데 그중에서 먹고 싶은 게 좀 생겼거든. 그것들 하나씩 사 먹을 거야."
거리에 있는 상점만 해도 음식들은 처음 보는 것투성이긴 했다. 마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음식들이 난무했다. 어떤 곳은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었고, 어떤 곳은 음식의 재고가 빠르게 떨어져 문을 일찍 닫았다. 어떤 맛이길래 그리도 인기가 많은 것인지 궁금하던 찰나에 소녀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주워들었는데, 축제의 마지막 날 밤엔 항상 불꽃놀이라는 걸 한 대. 그걸 마지막에 보려고"
"불꽃놀이.., 그게 뭔데?"
"··음, 주워듣기론 예쁜 색색의 불꽃들이 어두운 하늘에서 크고 예쁘게 펑 하고 터진대. 그게 엄청나게 아름답다고 해서.."
"나 혼자 보러 가긴 심심할 것 같으니까 나이브도 같이 보러 가자."
"그래, 맘대로 해."
같이 보러 가자는 말에 나이브는 좀 전에 느꼈던 심장의 알싸함을 다시 느꼈다. 어제 먹은 게 얹히기라고 한 것일까. 속이 답답한 것은 아닌데 나이브는 자꾸만 조여오는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과 나이브는 광장을 돌아다니며 나름 즐겁게 놀았다. 남은 은화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사 먹었고, 재미난 놀이가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소녀는 재밌는지 하로 종일 미소가 사그라 들지 않았고, 나이브 또한 축제의 거리는 재밌는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자 어느덧 해가 뉘웃뉘웃 졌다.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 불꽃놀이가 시작될 것이란 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섰다. 사람이 많아지자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는 일이 다소 잦아들었다. 조심히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사들이 한둘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브. 축제날인데 기사가 왜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까?"
"아마.., 축제날에 소매치기나 뒷 범죄가 더 쉽게 일어나니까. 그 예방 차원인 거겠지"
나이브의 답에 소녀는 축제날인데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바쁘구나 생각했다. ..그나저나 너무 좁아.., 빽빽하게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계속해서 몰려드는 인파에 엉거추춤 한 걸음으로 나이브의 옆에 꼭 붙어 걸었다.
툭-
"아!"
(-) 옆을 지나던 덩치 큰 행인과 소녀의 어깨가 부딪혔다. 그 행인은 바로 사라졌으며, 고의로 강하게 친 것인지 부딪힌 어깨가 얼얼했다. 그 덕에 품에 안고 있던 헤럴드 신부님의 선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에 나이브가 뒤를 돌아 도움을 주려 하였으나, 빼곡한 인파로 인해 점점 사람들에게 떠밀렸다. 나이브의 얼굴이 다급해지는 게 보였다.
"잠, !"
"앗, 나이브..!"
툭-
"아!"
지나가던 사람이 실수로 선물을 발로 차버려 멀리 튕겨 나갔다. (-)은 서둘러 빨리 그쪽으로 손을 뻗어 선물을 주웠고, 몸을 재빠르게 일으켰으나 이미 나이브는 사람들에게 떠밀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이브가 나중에 화 좀 내겠는걸..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은 우선 이 인파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길을 더 들었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다 저 멀리 기사 한 명이 순찰 중인 것을 발견하고 도움을 청할까 했다. 인파를 조금씩 뚫고 어느덧 기사의 뒤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확, 소녀의 얇은 손목을 강하게 낚아챈 누군가 계속해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우악스럽게 잡아끄는 힘에 억지로 끌려가며, 소녀는 여러 사람과 부딪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은 신부에게 줄 선물을 전처럼 놓칠세라 꼬옥 제품에 쥐고 있었다. 한참을 끌려가다가 쿵 하고 넘어졌다. 인적이 드문 건지 다른 곳보다 빛이 적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제 손목을 누가 이리도 아프게 잡아 끈 것인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당신은 좀전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방금 전 제 어깨를 강하게 치고 그냥 사라졌던 사람이었다. 왜.. 왜 이 사람이 갑자기. 몸을 다급하게 일으키고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말했다.
"뭐야? 왜 눈을 그렇게 뜨는데? 저 많은 인파에서 빼줬는데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왜 그렇게 기분 나쁜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냐고!"
"전 당신한테 도움을 청한 적이 없는데요."
남자의 윽박에 동공이 작게 떨렸으나, 우선 불쾌하게 잡힌 손목이 저릿해 손을 팍, 빼냈다. 잡힌 손목이 울긋불긋하게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성난 목소리로 남성은 (-)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어냈다.
"도와줬는데, 감사합니다~ 하지 못할망정, 도움을, 청한 적이, 없다고, 감사 인사도, 안 해?"
계속해서 머리를 툭툭 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제정신이 박히지 않은 제 눈앞의 남자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물다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잠깐잠깐. 그거 내놓고 가. 그거 꽤 값나가 보이거든."
남자가 손가락질하며 헤럴드 신부님께 드릴 선물을 가리켰다. 설마 이럴 작정으로 처음부터..! 기가 차지도 않았으나, 저보다 한참 덩치 큰 남자는 무서웠다. 도망가자. 이 생각이 미치자마자 바로 달렸다. 방금 전 인파가 몰리던 곳으로 달려가면 기사가 있을 테니 도움을 청하자 싶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한 남자를 따돌리는 건 어려웠다. 금세 손목이 다시 붙잡혔다.
"그거 내놓고 가라고! 도움을 줬으면 뭐라도 주는 게 예의 아니야?!!"
"이거, 놔!"
"끄아악!!!!"
남자가 소녀의 품에 포장지 위로 손을 뻗자, 소녀는 그 손을 콱 하고 이빨로 물었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지르다가 소녀의 멱살을 잡고 한쪽 손을 세차게 들어 올렸다.
"이 망할 계집이!!!!!"
맞는다. 손을 치켜세운 남자의 손은, 우악스럽게도 컸다. 저 손에 맞으면 한순간에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꽉 물고 눈을 질끔 감았다.
뻐억!
타격 음이 들렸다. 이상하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누구의?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눈을 뜬 순간 (-)은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심정을 겨우 참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다 열렸다.
"나이브.."
"괜찮아!?"
나이브의 손엔 각목이 들려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제 눈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멀리서 (-)을 끌고 가는 것을 못 보았더라면. 어디로 간 건지 귀를 기울여 듣지 못했다면, 찾지 못할 뻔했다. 나이브가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흠칫, 가느다란 손목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곧 멍이 들 것 같아 나이브의 표정에 금이 갔다.
"이.. 이 사람은.."
"넌 지금!.. 하.., 이 정도론 안 죽어. 머리를 타격한 게 아니라 등을 있는 힘껏 내려쳐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니까."
"아.."
피해는 저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놈의 안위이나 걱정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욱하여 화를 낼 뻔했으나, 나이브는 빠르게 머리를 식혔다. 나이브가 인상을 구기자마자 작은 어깨를 가녀리게 떠는 것이. 마냥 저가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놀란 것은 (-) 본인일 터였다. 지금은 위로가 먼저인 게 맞았다. 나이브는 그녀 앞에 등지고 서서 몸을 숙여 앉았다.
"우선 업혀."
"··으응.."
포옥, 제 등 뒤로 무게감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다리를 손으로 받치고는, 나이브가 일어섰다. 무엇을 먹고 다니기는 하는 것인지. 생각한 것보다도 소녀의 몸이 가벼웠다. 나이브는 시선을 내려 제 발치 아래에 기절해 있는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뻑-
"나, 나이브!"
"뭐."
갈비뼈가 부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절해 있는 남자의 옆구리를 세차게 찼다. 소녀가 제 이름을 타박하듯 부르긴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는 기절해도 아프긴 아픈지 입에서 괴랄한 신음 소리를 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동안 보이는 기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아마 이놈은 곧 잡혀갈 것이다. 일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자리를 피하자고 생각한 나이브는 발을 움직였다.
이미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위쪽에 자리를 잡았는지, 아래쪽엔 사람이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소녀는 그제야 밀려오는 안도감에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미안."
"응? 왜 사과하는 거야..?"
뜬금없이 사과를 하는 나이브에 소녀가 사과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단 듯 물었다.
"... 보호자 역할로 널 따라왔는데 내가 널 놓쳐서 이런 사달이 났으니까"
"나이브 탓이 아니야. 그 남자가 마음먹고 따라온 이상 어쩔 수 없었는걸.."
"..."
나이브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이 사단이 벌어진 게 본인의 부주의한 일로 생긴 것 같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손이라도 잡고 걸었어야 했을 터인데 차마 그러지 않았다. 수녀는 나이브가 원래도 과묵한 성격이었으나, 제 일로 더욱더 기분이 다운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기운을 북돋아줄 말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날 구해줬잖아."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운이 좋기도 했지. 그래도, 나이브 기사님처럼 정말 멋있었어."
피식. 그는 어이없단 듯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저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 믿지를 않는 것 같아 조금은 얄미웠다. 속으로 툴툴대고 있으니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거라는.
"나이브 나 내려줘"
"안돼."
"안 내려주면 평생 원망할 거야."
"하.."
소녀의 질 나쁜 협박에 나이브가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은 주머니에서 동화 하나를 꺼내곤 나이브의 손에 쥐여주었다.
"나이브 나 마지막으로 하나 먹고 싶은 게 있어"
"?"
"저거.."
나이브가 뭐냐는 것처럼 내려다보자 (-)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이브가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연 분홍의 무언가 가벼워 보이는 음식이었다. 마치 구름 같은 모양새였다. 글씨를 읽으니 솜사탕이라 적혀져 있었다.
"미안.. 내가 가서 사 오고 싶은데, 좀 전의 일로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잘 안 움직여져서.."
이따끔씩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기죽은 강아지 같다 생각했다. 겨우 이 정도로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건데.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의 머리 위로 툭 울렸다. 길고 섬세히 뻗은 손가락이 전의 일로 조금은 헤집어진 머리카락을 정리 시켜주곤 말했다.
"여기 서서 기다려. 금방사 올 테니까."
"응."
잠시 후 나이브가 솜사탕을 사들고 왔으며,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소녀가 풀린 다리로 느릿느릿 걸었으나, 나이브는 그런 소녀의 보폭에 맞춰 같이 천천히 걸어주었다. 중간에 다행히 벤치가 남아있어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이브는 소녀 앞으로 솜사탕을 내밀었다.
"네가 말한 이거. 사람들이 줄을 좀 서있어서 오래 걸렸어."
"··아마 주워들은 말로, 사람들이 불꽃놀이 때 솜사탕을 먹는 게 인기라고 소문이 나있어서 그런가 봐"
나이브가 내민 솜사탕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뭐 그리도 주워들은 게 많은 건지 그는 피식 웃어 보였다. (-)은 솜사탕을 빤히 바라보다 손으로 조금 뜯어서 입어 넣었다. 솜사탕이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사라지는 느낌에 세상 신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 먹어본 솜사탕은 달콤했다. 불쑥 소녀가 나이브의 얼굴 앞에 솜사탕을 내밀었다.
"나이브 이거 먹어봐 정말 신기해"
(-)의 요구에 나이브 역시 조금 솜사탕을 뜯어 입에 넣어보았다. 그는 평소 단 걸 좋아하지 않기에,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며 솜사탕을 밀어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이건 좀 별로군.
"왜 별로야?"
"··달아"
"아.., 맞다 단거 싫어했지."
그 순간이었다. 피유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푹죽이 펑 하며 불꽃이 터졌다. 폭죽이 터지자 (-)과 나이브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연달아 피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푹죽들이 펑펑 터지면서, 알록달록한 색들이 하늘에 꽃처럼 활짝 퍼졌다. 처음 보는 광경에 소녀는 한참을 멍 때리고 바라보다가, 그제야 생각이라도 난 듯 부스럭거렸다.
"나이브"
폭죽이 시끄럽게 터지는 소리에도 (-)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귀에 잘 안착했다. 고개를 소녀 쪽으로 돌리자 눈앞에 종이봉투를 내민 손이 보였다. 본인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듯이, 소녀가 팔을 좀 더 쭉 내밀었다. 빨리 받으라는 뜻이었다. 나이브가 얼떨결에 건네받자 소녀는 차분히 웃어 보였다.
"열어보고 싶으면 지금 열어봐도 돼."
그 말에 나이브는 궁금증이 생겨나 포장지를 몇 초간 바라보다 바로 종이봉투를 열었다. 안에 있는 무언가를 빼내니 하얀색과 청록색으로 길게 엮어 만든 긴 끈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기에 이것을 선물한 소녀를 바라보자, 소녀는 답했다.
"기사의 무사를 기원하는 행운의 끈이래. 나이브가 솜사탕 사러 갔을 때 골라봤어. 상인 말로는 검에 묶고 다니는 거라더라."
"이걸 왜 나한테.."
"날 좀 전에 구해준 게 기사님 같아서.., 그리고 나이브 덕에 수도에 온 거니까 선물 겸 한번 골라봤어. 어때, 마음에 들어?"
나이브는 말없이 제 손 위에 올려진 끈을 바라보았다. 알싸하게 조이기만 했던 심장이 제 존재를 알리는 것 마냥 갑자기 세차게 쿵쿵 뛰었다. 왜 자꾸만 이러는 건지. 난생처음으로 받은 선물에 신이난 어린아이가 된 건가 싶었다. 쿵쿵 뛰기만 했던 심장이 모자랐는지 찌르르 아파왔다. 뭔데 이거. 난생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누군가 제 심장을 아무렇게 헤집는 것 같았다. 나이브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피융- 펑. 불꽃이 다시 검은 하늘에서 밝게 저를 강조했다. (-)의 시선이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가자, 나이브가 살짝 고개를 소녀 쪽으로 돌렸다. 소녀의 눈동자에 담긴 불꽃이 아름답게 퍼졌다. 그제야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이 이 소녀를 향한 제 마음인 걸까 생각했다. 나이브의 시선이 차츰 내려가 입술에 정착하는 순간. 점점 소년의 몸에 열기가 파릇파릇 올랐다. 그 느낌에 목이 타는 거 같아 마른침을 꿀꺽 삼켜버리고는 제 손위에 올려진 끈을 꽉 쥐였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획 돌려버리고는 숙였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나이브는 불꽃놀이에 몰두하고 있느라 소녀의 시선이 제게로 쏠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옅게 마른 세수를 하며 최대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름답게 쏘아 올리던 불꽃이 10분간 이어지다가 이내 사그라 들었다. 양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쭈욱 편 소녀가 제 옆을 바라보자 나이브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응"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까지 추스르려 했던 마음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나이브의 본심은 소년을 비웃는 것 마냥 심장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어떻게든 해보려 하였으나,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나이브가 일어나니 소녀가 뒤따라 일어났다.
본인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들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앞서 걸었다. 뒤에서 불꽃놀이에 대해서 조잘 거리는 가는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달콤하게 들려왔다. 나이브가 살짝 입맛을 다시자, 입안에 넣었던 솜사탕의 달콤한 맛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달았던 맛이었으나, 절대 잊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
그 이후로 축제가 끝났고, 다음날 마차를 타며 살던 마을로 이동했다. 갈 때는 그리도 지루하게 흘렀었는데, 돌아올 때는 어느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나이브는 속으로 아쉽단 생각을 했다.
마을로 돌아오고 난 후부터 나이브는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으며, 꿈을 위해 밤낮을 지새워가며 움직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았었으나, 기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서류를 넣기 전,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했다.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났고, 수녀가 된 (-)을 보고는 나이브는 성기사단에 면접 서류를 제출했다.
몹시 운이 좋았다 생각했다. 성기사단 경우 일반 기사단과는 다르게, 4년의 한 번만 모집을 하니까. 일이 잘 풀려 앞으로 좋은 앞날만이 이어질 것이라는 나이브의 생각을 세상은 비웃듯. 1차 합격 면접 통지서는 헤럴드 신부님이 돌아가신 날 도착했다.
그는 1차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나서 하루 종일 고민에 빠져있었다. 만약 지금 떠나게 된다면.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지치고, 힘들 시간을 보낼 소녀의 곁을 떠나야만 하니까. 2차 면접은 수도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며, 11일 후였다.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며, 늦더라도 내일 저녁엔 출발해야 했다.
나이브는 그 일주일 동안 제 옆의 수녀를 위로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어제저녁이 되어서야 마음을 다 잡았다. 나이브는 그토록 꿈꾸던 기사가 되어 제 옆 가녀린 소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리곤 언젠가 저가 가지고 있을 검.., 그리고 그 검에 가지런히 묶여 있을 청록색의 끈을 보여주며, 소녀에게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네 덕에, 그리고 너를 위해 기사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마지막엔 고맙다고.. 그리 말하고 싶었다.
차마 굳게 닫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이내 나이브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왜 이리도 떨어지지 않는 걸까.
"··나 오늘까지만 슬퍼할 거야."
가느다란 음성이 나이브의 귓가에 녹아들었다. 고개를 들어 옆으로 돌리자 눈 주변이 빨갛게 부어오른 수녀의 얼굴이 보였다. 힘없이 반쯤 감긴 눈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이내 수녀가 나이브와 눈을 마주치며 포근히 웃어 보였다.
"나이브. 나한테 할 말 없어?"
"응?"
"너 수도에 넣은 서류 1차 붙었다며. 헤럴드 신부님 건으로 너네 아버지가 찾아오셨을 때 말씀해 주시더라"
"··어떤 일인지도 알고 있어?"
나이브의 짧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이브의 아버지는 일부러 소녀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부모가 아닌가, 제 아들이라면 말하지도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을 게 눈에 빤히 보였다. 그러니 말을 쉽사리 꺼낼 수 있도록 수녀에게 말을 해준 것이었다. 나이브는 무표정한 얼굴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어떤 일 인것까지 아는 걸까. 그것만큼은.. 제가 말해주고 싶었다. 수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까지 말은 안 해주셨어. 나중에 직접 들으라 하시더라"
"아.."
그 말에 철렁였던 나이브의 심장이 다시 고요해졌다. 첫 스타트가 시작되니 다행히 안심이 되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총 3차 합격인데 당당하게 말하고 갔다가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면 그것도 웃기잖아.,"
"그게 왜 웃기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인데 떨어질 수도 있는 거지."
"··어떤 일인지는 나중에 말하려 했어."
나이브가 시선을 깍지 낀 제 손 아래로 두며 반절 정도 감았다. 어딘가 초조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궁금해하면 말해 주어야 할까 싶었다. 나이브는 원래도 표정의 변화가 있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그간 옆에서 오래 봐온 만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녀는 대강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 그럼. 면접 붙어서 크게 성공하게 되면 말해줘, 기다릴게."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잘 모르겠으나, 때가 되면 말해줄 테니 괜찮았다. 나이브에게 질문을 강요하거나 캐묻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본인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던 사람이기에, 이번엔 제 차례가 맞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별로~"
수녀가 별거 아니란 듯 웃어 보였다. 가만히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이브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일렁였다. 그의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불꽃놀이의 그날처럼, 수녀의 머리 위로 툭 떨구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수녀는 코이프를 머리 위로 두르고 있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만질 수 없었으나, 그는 만족했다.
"시간이 남을 때마다 편지 보낼게."
"응.. 열심히 해 나이브."
다음날. 수도로 출발할 마차가 미리 도착해 있었다. 배웅을 해주러 나온 수녀는 나이브와 짧게 인사를 마쳤다. 남이 보기에도 둘의 대화는 간결하게 짧았으나, 이미 두 사람은 어제 나누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나누었기에 괜찮았다. 마차에 탑승하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나이브는, 짐을 싣고 나서 수녀를 제품에 조심스럽게 와락 끌어안았다.
3차까지 통과되고 난다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성기사들은 일반 기사들보다도 하루가 바쁘다 들었으니. 최종 합격이 된다면 다시 수녀와 제외할 그때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나이브는 알고 있었다. 조심스레 끌어 안겨지자 나이브 특유의 향이 (-)의 코에 흩뜨려졌다.
저를 가족처럼 소중히 대해주던 나이브이기에 손을 들어 올려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괜찮다는 듯,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듯이. 토닥임이 멈추자 가보겠다며 나이브가 떨어졌다. 고개를 빠르게 돌리고, 서둘러 마차에 타는 나이브의 뒷모습을 보았다. 귀 끝이 살짝 빨개 보였던 것 같았으나, 확실히 봤다고 하기엔 서둘러 그가 마차에 탑승했기에 정확히 보진 못 하였다.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은 눈을 떼지 않았다. 마차가 시야에서 다 사라지고 나서야 수녀는 성당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친구이자 가족 같던 나이브도 수도로 떠났다.
✧❅✟❅✧
헤럴드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신부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 저에게 보냈던 나이브의 편지마저도.. 3개월이 지나면서 차츰 뜸해지다가, 근래에는 아예 소식이 뚝 끊겨 들려오질 않았다. 공석이 대략 5개월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러자 몇몇의 수녀가 성당을 떠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부가 없는 성당은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제국에서 제일 동떨어진, 변두리의 작은 시골 마을 성당의 신부가 될 사람은 없었다. 이런 시골마을보단, 수도 근처의 신부가 훨 영향 있을 테였다. 5개월 정도를 기다렸으나 공석이 채워지지 않으니 떠나는 것도 당연했다. 소녀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인원이 남았으나, 그 인원마저도, 계절이 바뀌고 2개월이 지나 소녀가 열여섯이 되는 해에 결국 성당을 떠났다. 성당을 떠나기 전 한 수녀가 소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말로 같지 가지 않을 거니? 여기에 혼자 남는 건 힘들 거란다. 그리고 또···"
같이 떠나자며 제안한 수녀는. 소녀가 여덟 살일 적 부모를 잃었을 당시 울고 있던 본인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던 그 수녀였다. 수녀는 이 소녀가 걱정되었다.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그리고 나이브가 마을을 떠난 이후부터 한 번도 미소를 지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웃음이 많았던 그 소녀가. 그 이후로 한 번도.. 계속해서 쭉 표정 없는 얼굴로 지내었다. 신부님을 잃은 상처와 더불어 저를 보듬어 주던 소중한 친구마저 마을을 떠난 이유렸다. 수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너도 알 거란다. 이 이상 공석이라면, 더 이상 새로운 신부님께서 이곳에 올 가능성은..,"
수녀는 차마 마지막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소녀는 수녀가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소녀는 수녀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압니다.. 하지만 전 이곳에 남아있고 싶어요."
신부님의 흔적이 어렴풋 남은 이곳을 소녀는 떠날 수 없었다. 홀로 남는다 해도 마음 한편은 괜찮았다. 추억이 담긴 장소를 떠나는 것은 한 번으로도 족했다.
"하지만.., 헤럴드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하시는 말씀을 너도 들었지 않니."
수녀님의 문득 낮아진 음성.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을 떠나라 말씀하셨던 신부님의 표정.., 그리고, 당시엔 놀라서 자세히 듣지 못한 신부님의 마지막 말.
그 마지막 말을 정확히 듣고 기억하는 수녀는 없었다. 신부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 그리고, 외상에 상처도 없고 그간 자잘한 병도 없었던 신부님께선, 왜 피를 토하며 괴롭게 돌아가신 걸까. 이것은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하였다.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 같은 일이었다.
"나는 신부님께서 이곳을 떠나라 하셨을 때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단다. 무엇보다 떠나라 한 이유가 있을 거고."
"..."
소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자 남더라도 괜찮아.. 다른 수녀님들이 처음 이곳을 떠나갈 때부터 굳게 다짐했었다. 더 이상의 질문은 강요가 될 것 같아 수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녀는 주머니에 있던 종이를 꺼내 소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녀가 옮길 성당의 이름이었다.
".. 마음이 바뀌게 되면 이곳으로 오렴."
그렇게 어머니이자, 언니였던 남은 수녀들마저도 이곳을 떠났다.
✧❅✟❅✧
그 후로 또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쌀쌀한 날이 풀린 초봄이었다.
처음에야 외로웠다만 그것도 잠시었다. 홀로 성당을 지켜야 하니 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쁘게 움직이면 어느덧 저녁기도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성당 앞에 흩뜨려진 나뭇잎들을 빗자루로 쓸어내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왔다.
기도를 하러 온 마을 사람일까 했으나 아니었다. 가끔씩 마을에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수도에서부터 우편배달부가 방문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는지. 우편배달부가 힘든 기색으로 언덕을 오르는게 보였다. 수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해맑게 웃어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 수녀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맞는지 물었다. 이름을 묻는 이유는 단순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 그러나 본인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던가. 티는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 우편배달부를 경계했다.
배달부는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수북이 쌓인 편지가 보였다. 그는 익숙한 듯, 제일 앞쪽에 있던 편지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교황청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교황청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말에 수녀의 동공이 커졌다. 얼떨결에 팔을 뻗어 편지를 건네받았다. 배달부는 짧게 인사를 하고 갈 길이 바쁜지 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시선을 편지로 두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종이었다. 그리고.., 금색 실링 왁스에 찍혀져 있는 문양은 교황청을 대표하는 문양이었다. 수녀는 빗자루질을 빠르게 끝내고, 기도를 마친 뒤에야 방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아.."
내용은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러했다. 신부의 자리가 공석인지도 어언 8개월이 지난 이 성당에, 새롭게 배정이 된 신부님이 오게 될 예정이란 편지었다. 일주일 뒤면 이곳에 도착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녀는 솔직한 심정으로 이제 와서야? 생각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배정을 해주었더라면, 다른 수녀님들께서 떠났을 리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신부님이 온다면 헤럴드 신부님의 방을 사용할 것인데.. 몇 개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신부님의 방은 살아계실 당시 그대로였다. 차마 그분의 흔적을 지우기엔 마음이 따르지 않았다.
"..수도 근처의 성당을 배정받지 못하신 건가."
차라리 이 이상 신부님은 오시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에 배정된 신부님은 본인의 의지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아닐게 눈에 선했다. 신력이 약하여 치열한 배정에 밀려나, 한참 동안 공석이던 작은 시골마을 성당에 배정받은 것일 테지. 분명 그 신부님은 티는 내지 않더라도 기분이 분명 언짢을지도 모를 것이란 게 수녀의 생각이었다.
"..."
일주일. 일주일 안으로 신부님께서 사용하셨던 방을 정리해야만 했다. 작게 일렁이던 촛불이 수녀가 분 바람으로 인하여 사르륵 꺼졌다.
✧❅✟❅✧
일주일이란 시간은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게 흘러갔다.
새롭게 오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수녀는 성당 밖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를 받고 나서 이틀이 지난 뒤에야 헤럴드 신부님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문을 열었었다. ..먼지가 쌓이지 않은, 혼자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신부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 후, 빈 방을 다른 수녀님들과 돌아가며 먼지가 쌓이지 않게 틈틈이 청소했다. 그마저도 남은 수녀님마저 떠나고 홀로 정리했다. 멀뚝하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을 나선 게 하루 이틀이 지나니 훌쩍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다가왔다. 결국 수녀는 방을 정리하지 못했다.
생각에 빠지고 있자니 언덕 아래서부터 마차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신부님께서 오셨다는 생각에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아 마주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점점 인영이 보이자 수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호화로운 마차는 뒤로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골 수녀가 보기에도 한눈에 알아볼 성기사단 네 명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원래 신부님이 배정받으면,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건가 생각했다. 왜 인지 모를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말이 자리에 서자 마차가 연이어 제자리에 멈추었다. 제일 앞에 있던 적갈색 머리의 기사가 말 위에서 뛰어내리자 흙먼지가 작게 일었다. 수녀에게 뚜벅뚜벅 걸어온 기사는 그녀의 앞에 섰다. 남자는 꽤나 건장한 체구였다. 수녀보다 어깨너비가 세배에 달했으며, 키는 저보다 30센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어깨너비와 키만큼 덩치도 곰처럼 거대했다.
그런 남자 앞에 작은 체구의 수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얼마나 큰지, 목이 좀 뻐근한 느낌이었다. 이 마을에서 이만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있던가..? 아마 없었다. 눈을 살짝 돌려 나머지 기사들을 보니, 제 앞에 있는 남자와 덩치가 비슷했다. 성기사들은 이렇게 다 덩치가 큰 걸까 생각했다.
"(-) 수녀님이십니까?"
제 앞에 있던 남자가 묵직하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곧바로 시선을 남자에게로 돌리곤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자신이 맞다 말하니 남자는 반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얼떨결에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숙이곤 인사했다. 다시 고개를 든 기사는 입을 열었다.
"전 교황청 소속 제2기사단장 케일리온이라 합니다."
"··네..? 네, 네.."
수녀의 동공과 입이 조금 벌어지며 놀랐다. 퍼뜩 정신 차린 수녀는 눈앞에 남성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한쪽 손으로 입을 막고 큼큼거렸다. 수녀가 이 정도 놀란건 양호한 편이었다. 당연하기도 한 게 기사단장은 무려 기사단들을 통솔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시골 변두리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새로 오시는 신부님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시선을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다른 기사가 말에서 내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마차와는 다르게 열리는 문안에선 지극히도 평범한 신부 복장을 한 남성이 내렸다. 수녀의 눈이 다시 크게 떠졌다. 정확히는 옷만 평범했다. 신부 옷을 입은 남자는 꽤나 젊었다. 얼핏 보기에도 자신과 별로 나이차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수녀가 생각한 신부님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 약간의 멍한 상태로 바라보자. 새로 온 신부는 왼쪽 손에 각진 가방을 들고 수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기사들과는 다르게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진 않았으나, 적당히 큰 키와, 그 키에 맞는 어깨너비를 가지고 있었다. 신부는 꽤나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선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수녀님의 성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일라이 클락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낮으면서도 고운 목소리였다. 문득 생각난 다부진 목소리를 가진 나이브와는 확연히 다른 음성이었다. 수녀도 한 손을 내밀며 맞잡았다. 자신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는 게 좀 이상했다만 그러려니 했다. 작년 수녀가 되기 위해 작성했던 서류를 헤럴드 신부님께서 교황청으로 보냈었으니까. 그 서류에서 본 것이겠지 했다.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신부님."
✧❅✟❅✧
짧게 인사를 마치고 난 후에야 기사단장과 나머지 기사들은 성당을 떠났다. 용건이 다 끝났으니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을 테였다. 기사들이 떠나고 성당을 소개하기 위해 수녀와 신부는 성당 안으로 발을 옮겼다. 수녀는 신부에게 간단한 내부 설명을 이어나갔다. 입으론 쉴 틈 없이 말하면서도, 머릿속엔 기사단장이나 되는 사람이 호위를 해주었단 것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신력이 약한 신부님이 아니라 생각보다도 높은 직급에 속하는 신부님이신 걸까 되뇌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그런 분이 이런 곳까지 올 이유가 없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잘한 설명이 끝나고, 신부님께서 사용할 방을 안내해 주기 위해 헤럴드 신부님께서 사용하셨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 수녀는 멈칫,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결국 헤럴드 신부님께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새 신부님께서 이것을 보고 언짢아하시면 어떻게 하지.. 입술을 잘근 씹다가,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 뒤를 돌아 입을 열었다.
"··신부님께는 죄송하지만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할 말이란 게 무엇일까요?"
큰 죄라도 지은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수녀의 모습에 신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시겠지만 이곳은 이전 신부님께서 사용하시던 방입니다. 다만.., 차마 신부님께서 사용하신 물건 정리를 할 수가 없어서, 아직 유품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이전 신부님께서 사용하던 물건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라고 묻고 싶었으나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억지스러운 배정일지라도, 앞으로 이 마을을 위해 한평생을 이곳에 지내셔야 할 신부님께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너무 염치가 없지 않은가.
수녀는 괜히 손가락 끝이 굳는 느낌이었다. 신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만 뻥긋거리는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말은 못 했으나, 눈치 빠른 그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방을 들여다보아도 괜찮을까요?"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신부의 말에 수녀는 고개를 들고 곧바로 몸을 비켜주었다. 신부가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고 열자, 나무 특유의 향이 훅 풍겨왔다. 방 안으로 발을 내딛고,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니 어딘가 모를 안락함이 느껴졌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공석이라 하기엔 꽤나 정리 정돈이 말끔히 되어있는 공간이었다. 그간 자신에 뒤에 서있는 수녀가 얼마나 정리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책상으로 눈을 돌리니 이전 신부가 사용했었을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성경이라든가, 펜이라든가 그 외의 물건들. 문득, 신부는 수녀에게 전 신부가 어떤 존재였는지 궁금해졌다.
"··전 신부님을 많이 의지하셨나 봅니다."
"아니면 존경일까요?"
뒤를 돌아보며 묻는 일라이의 입은 엷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죄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의 고개가 서서히 들려 일라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라이가 마주한 제 앞, 작은 여자의 눈동자는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마치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다 지친 사람의 눈빛이었다. 신부의 말에 수녀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의지 또는 존경.., 그런 간단한 복합적인 말보다.. 뭔가, 좀 더 깊은..,
"저는, 전 신부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말하는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혈족애의 사랑이었다.
헤럴드 신부님, 그는 좋은 스승이자 때로는 자상한 부모였다. 다정하면도 한결같이, 숨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음에도 그분은.. 그녀에겐 다정한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를 자신의 자녀처럼 돌봐주셨고, 저 또한 그분을 아버지라 생각하며 따랐어요. 그런 그분을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궁금증이 해결이 되셨을까요?"
"충분히 되었습니다."
수녀가 미약하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아프게 일그러뜨렸다. 일라이는 수긍하듯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겨 책상 앞에 선 신부는, 본인이 들고 온 가방을 책상 위로 차분히 내려놓았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다고 하기에는 어중간한. 네모난 가방을 내려둔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수도에서 내려올 때 가져온 물건들은 이것이 다입니다. 전 무거운 것을 싫어하거든요."
일라이의 말에 (-)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지으며 벌어졌다.
"전 앞으로 제가 지낼 공간이 풍족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나요?"
신부의 말에 수녀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작게 일렁였다. 방금 전의 질문과는 다른 떨림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헤럴드 신부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겠다는 의미였다. 수녀의 입술이 작게 떨렸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은 일라이의 말에 가슴이 속절없이 떨리는 것 같았다.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치는 느낌에 금방이라도 눈앞이 흐려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수녀는 눈앞에 남자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함을 전달했다. 목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떨렸다.
"이제야 수녀님께서 웃어주시는군요."
..?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마치 본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었다는 듯, 이내 놀란 표정을 지어냈다.
신부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이브가 마을을 떠난 후에 처음 지어 보이는 미소였다. 생각보다도 본인은 아직까지도 두 사람을 많이 그리워하는구나를 새삼 느꼈다.
..그래도 신부님께서 사용하시던 물건을 그대로 둘 수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냥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이런 결정을 내려준 신부님께 굳게 닫혀있던 마음이 열리는 것 같았다. 새롭게 오실 신부님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 한편으로는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죄스러운 마음이 씻겨 내려갈 수 있도록, 눈앞에 있는 신부님과 신께 수녀의 의무를 다 하자 생각했다.
"..앞으로 최대한, 신부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수녀님과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신부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아 이내 흩뜨려졌다.
이게 그와 그녀의 짧고도 긴 맹세였다.
✧❅✟❅✧
그 후로 신부님. 일라이 클락은 마을과 성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부지런했고 하는 행동마다 다부졌으며, 그럼에도 피곤한 기색하나 보이지 않았다. 틈틈이 마을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소통했으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나이 드신 노인분들까지 신부를 신뢰하고 의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이 신부를 신뢰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넓은 성품과, 다정함이었을 터다.
수녀는 그런 신부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마치 헤럴드 신부님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텅 빈자리를 따뜻한 빛으로 고요하게 넓혀나가는 것 같았다. 수녀는 그런 느낌이 나쁘지 않다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모난 것 하나 없으신 분께서 왜 하필 이런 곳으로 오시게 된 것인지도 궁금했다. 제2기사단장이 호위를 해줄 정도이면, 고작 이런 작은 마을에 계실 위치가 아님이 분명했다. 궁금하긴 했으나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이 고요한 감정이, 그저 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
신부가 성당으로 온 지 어느덧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며, 계절은 봄이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하나 둘 만개했다. 유난히도 하늘이 쾌청한 날이었던 것 같다. 오전 기도를 마치고 나서 수녀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자, 외부에 놓여있던 벤치에 앉았다.
얼마 없는 마을 아이들이 성당 주변에 모여 꺄르륵 거리며 놀고 있었고, 그 중심엔 신부님이 서있었다. 이전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거진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은 되려 정 반대였다. 어린아이들과 놀아주는 다정한 신부님. 그 모습이 마치 동화 속 그림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어느덧 수녀는 그 모습을 멍 때리며 바라보았다.
톡 톡
몇 분이나 지났을까. 수녀는 본인의 어깨를 누군가 조심히 두드리는 느낌에 그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짧은 갈색 머리를 한쪽으로 땋은, 녹안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대략 여덟 살에서 아홉 살쯤 되어 보였다. 수줍은 표정으로 우물쭈물 거리던 아이는 수녀에게 꽃으로 만든 화관을 조심스레 건넸다.
"저에게 주는 건가요?"
(-)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작게 네..라며 웅얼거렸다.
수녀는 화관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가지의 알록달록한 꽃이 엉성하게 얽혀있었으나, 제법 화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화관을 들고 있는 손은 여자아이답게 작았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열심히 화관을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그 모습이 말로 형용할 수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수녀는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문득 그녀는 헤럴드 신부님이 생각났다. 신부님도 이러셨을까. 자신이 이 아이를 보며 느끼는 심정이 이렇듯. 신부님도 저를 볼 때마다 이런 심정이셨을까.. 이미 자유의 영혼이 된 자는 말이 없었다. 그건 (-)도 잘 알고 있었다. 부디 신부님께서도 이런 심정이셨길. 수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꼬마 숙녀님. 이렇게 예쁜 화관은 처음 선물 받아보네요."
고맙다는 수녀의 말에 아이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이는 다행히도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드는것 같았다. 본인도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으면 좋으려만, 아쉽게도 가지고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어쩌죠? 전 꼬마 숙녀님께 드릴 선물이 없는데..,"
아이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수녀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대신 수녀님의 머리에 씌어드려도 괜찮을까요..?"
아이는 질문을 마치고 난 후, 여전히 수줍은 표정으로 수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앞에 수녀님께서 거절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걱정 할 필요가 없다는 듯,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말했다. 손을 들어 올려 머리 위 검은 코이프를 벗었다. 코이프를 벗자, 긴 머리를 땋아올려 말아둔 수녀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수녀는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쉽에 머리에 화관을 올릴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이유였다. 수녀의 행동에 아이가 답하듯, 들고 있던 화관을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아이는 만족하듯. 양손으로 입을 살포시 가리고는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헤헤 수녀님 너무 이쁘세요!"
수녀는 너무나도 어여쁘게 웃는 작은 아이를 보며. 가슴이 알싸하게 조여오는 느낌과 동시에 감정이 일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순수하고, 새하얗게 맑은 이 아이 덕분에 괜스레 자신의 기분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얼핏 자신의 어릴 적을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내 모습도 저러지 않았을까.. 마을 아이들과 성당 주변에서 뛰어놀다가 헤럴드 신부님께 예쁘게 만개한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선물해 드리고, 날이 저물면 마을로 내려가 산에서 나물을 캐고 내려오신 부모님과 행복한 저녁식사를 하는 그런 이상적인 삶을. 상상만 하였을 뿐인데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화관이 잘 어울리시군요."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사근한 미소를 지은 신부님이 서있었다. 쾌청한 날씨 덕분이었을까. 그의 미소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살풋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감사하다 말했다.
"선물을 받으신 모양이군요."
"··네. 고맙게도 갈색 머리를 한 꼬마 숙녀님께서 선물을 해주셨답니다."
"아, 혹시 그 꼬마 숙녀님께선 녹안을 가지고 있었나요?"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나요?"
지금 성당 주변에서 놀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들만 하여도 대략 네 명 정도였다. 이 마을에선 흔한 머리색이기도 했다. 단번에 누군지 알아낸 그의 말에 수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리사 벡이라는 아이인데. 아버님과 기도를 하러 올 때마다 항상 무언가를 선물해 주더군요. 마음이 고운 아이입니다."
"그렇.. 군요"
처음 알았다. 외형을 묻는 것을 보아 그는 이곳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신부님께선 기도를 하는 분들의 성함을 자주 말했다. 아니 그 외에도. 마을과 자주 왕복하던 그는 가끔 저와 의논을 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신부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의 이름을 자주 말했었다.
저는 성당에서 자주 기도를 하는 분들의 얼굴을 대략적으로 기억만 하고 있었는데.. 수녀는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저가 이런데. 신부님께선 그만큼 이 마을에 노력하고 계시단 뜻이기도 했다.
수녀의 기억을 더듬어 신부가 이곳에서 생활한 1년간의 행적을 되짚어 보자면, 항상 자신보단 마을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한 여름에 폭우가 내려 마을 집 두 채가 물에 잠겼을 때도. 한겨울 폭설이 내렸을 때도, 몸을 우선적으로 움직여 불편을 겪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 일에도 본인의 건강은 뒷전으로 행동하였다. 그리고 매번 마을의 안위와 평화로움을 위해 신께 기도했다.
그것을 곁에서 매번 봐왔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짧게 생각이 미치니 심정이 복잡해졌다. 힘들고 지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을 보여준 적도, 티를 낸 적도 없는 신부님. 전에 사그라뜨렸던 궁금증이 다시 피어올랐다. 이런 분께선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호위를 할 정도로 높은 계급 일게 분명한 분이.., 왜 무엇 하나 건지기 어려운 이곳에 오시게 된 것인지. 거절할 방법은 분명히 있었을 테였다. 이런 작은 시골마을보단, 수도 근처에 머무시는 게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그들 사이에 좋은 입담이 퍼지면 그만큼 명성이 오르기 쉬운 방법이었을 거다. 수녀는 고개를 들어 저를 등지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만족해하듯 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화관을 선물받아 들뜬 마음에 그런지, 아님 오늘따라 유난히도 날이 쾌청해서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신부님께선 왜 이곳에 오신 건가요?"
수녀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등을 지고 서있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일라이가 돌아본 수녀의 얼굴은 꽤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질문한 것에 놀랐다.
"아.., 그 다른 이유는 없고.."
..다른 의미가 없지 않을 리 없었다. 신부님께서 처음 오셨을 1년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이 아니었는가. 앞으로도 이곳에 계실 분인데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도 했다. 의구심만 가지면 해결될 일은 없었다. 어영부영 넘어가기보단, 이참에 한번 제대로 여쭤보는 것이 신부님의 의도가 어떻다 하든 속이 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신부님의 얼굴을 바라보니 편히 말해보라는 듯 기다려 주는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일반 기사님도 아니고 기사단장님이나 되시는 분과같이 오신 것이니까요. "
"그런 분이 호위를 해주실 정도이고, 신부님께서 그 정도 위치 시라면.. 굳이 이리 힘든 곳으로 올 필요가 없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멀리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휩쓸려 풀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꽤나 시원했다. 그동안 하지 못해 응어리진 자신의 마음을 씻겨 내려 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을 타고 온 달달한 꽃의 내음이 신부의 코 끝에 흩어졌다. (-)의 질문은 일라이가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다만 조금 더 빠르게 물어봤었을 거라 생각했던 질문이 1년이 지난 후라니, 그도 예기치 못하긴 했다.
"지금에서야 묻는 이유가 있습니까?"
"원래는 묻지 않으려 한 질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원래는 묻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라. 수녀는 생각 외에 대답을 내놓았다. 어째서일까, 굳이 묻지 않으려는 이유라도 있었을까 생각했다. 조금 전 당황했던 기색은 어디 가고 수녀의 얼굴은 조금 편안해 보였다.
"왜 묻지 않으려 했던 질문인지 답해주시면 저도 답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실 건가요?"
"당연한 말씀을."
솔직하게 말해준다는 일라이의 말에 수녀는 조금 생각을 하는듯싶었다. 신부는 딱히 숨길 마음도 없었고,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해주었다면 수녀가 괜한 부담을 느낄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답해주기 전 왜 수녀가 그런 생각을 한 건지 궁금했다. 생각을 다 마쳤는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질문에 신부님께서 불편하셔서 이 마을을 떠나실까 봐 그랬습니다."
"그 당시엔 신부님이 배정되지 않았던 터라 급급했었습니다. 억지스러운 배정을 받으셨을 거라 생각했고, 겨우 오시게 된 신부님이신데 제 질문에 신부님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어요."
"··딱히 곤란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만.., 생각이 엇갈렸다니 아쉽군요."
"아.. 그렇다면 진즉에 여쭤보았을 건데 괜한 고민이었군요."
신부의 말에 수녀는 약간은 허무하단 듯 미소 지었다. 신부는 괜히 그녀가 1년간 제 눈치를 봤단 것에 조금 미안해졌다. 볼 필요 없는 눈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야 어쩌다 이야기를 꺼냈다니. 부담이 갈까 밝히지 않았던 배려가 사실은 더 불편했다니 기분이 아이러니했다. 처음 왔었을 때부터 밝혔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미쳤다.
"이제 제가 답할 차례군요."
신부의 순서가 다가오자 수녀는 이따끔 입술을 씹었다. 그의 입에선 어떤 말이 나올까. 그동안의 궁금증에 대한 기대감 반과, 두려움 반이 머릿속으로 물이 고이듯 차올랐다. 괜한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전 이 마을에 제 의지로 온 겁니다. 억지스러운 배정 또한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짧은 수녀의 질문에 눈을 휘게 웃으며 답했다.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나고 자라 끝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죠."
"··단지 다른 사람보다 신성력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을 뿐입니다. 평범한 인간에 미치지 않다만.., 사람들이 구원받을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특별하단 수식어가 붙은 것뿐입니다."
신부가 특별한 사람이란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일라이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수녀가 그의 말을 집중하듯 경청하자, 신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남보다 높은 신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나, 이 신성력으로 남을 도울 수 있으니 저 역시 만족했습니다. 남을 돕는 것. 그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이 들더군요."
"그 생각으로 교황청에 몸을 담고 어려운 분들을 돕고 지냈습니다. 그리 지내다가 어느 날 얼핏 이 마을에 대한 입담이 퍼지더군요"
"입담..이라 하시면?"
마을에 대한 입담이라니? 지나치기 어려운 그의 말에 수녀가 물었다.
이 작은 마을에 대해 말할 게 있는 것일까.
"몇 개월간 신부가 배정되지 않아 배정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난처해 하고 있단 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다 보니 자연스레 제 귀에도 들리더군요.
"··그리고 이곳의 전 신부이신 헤럴드 신부님께서 건강하셨으나, 급작스레 소천(召天) 하셨다는 소문도 함께 퍼져있었습니다."
헤럴드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얘기가 나오자 수녀는 자신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괜스레 당시 헤럴드 신부님의 표정이 기억나 죄 없는 옷깃을 강하게 쥐었다. 교황청이 모를 일이 없긴 했다. 1년에 두 번 나뉘어 마을에 관한 관리와, 성당에서 거주하고 있는 신부와 수녀의 기본적인 리스트 서류를 거짓 없이 작성해서 보고해야 했었으니.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계셨던 수녀님께서 보내셨으며, 신부님께서 돌아가셨을 당시 상황을 거짓 없이 보고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가 보낸 서류가 딱 한 번이었다. 혼자 남았었기에 적을 것이 없어 작성이 빠르게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한데 그 소문은 왜.. 문득 하나의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헤럴드 신부님께서 급작스레 돌아가신 게 배정과 관련 있단 말씀처럼 들리는데.. 맞습니까 신부님?"
솔직한 심정으론 아니길 바랐다. 정말로 아니길 바랐다. 그리 다정했던 헤럴드 신부님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입에 불안의 요소로 불리지 않았길 바랐다. 하지만 본인의 불안했던 생각이 틀린 적이 있었을까. 그의 다음 말에 그녀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맞습니다. 배정을 신청하려 하시는 분이 간혹 계셨으나, 입담이 퍼지고 자신도 그리될까 두려워 거절하신 분들도 계시더군요. 좋지 않은 입담은 변형되어 퍼지기 십상이니··"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던 답이었다. 이 답을 들으니 가슴이 날카로운 칼에 쿡쿡 찔리는 느낌이었다. 배정이.., 사실은 변두리 작은 시골마을과는 크게 관계가 없었고, 헤럴드 신부님의 일이 좋지 않게 변형되어 그 긴 시간 동안 신부의 공석이 이어진 거였다니.. 할 말을 잃은 듯 어두워진 수녀의 표정에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 이유가 다가 아니었다. 당시 입담이 상당히 질 나쁘게 퍼져있었다. 신부가 악마와 계약하여 그 악마가 영혼을 거둬간 것이라는.. 그러니 외부에 상처가 하나 없이 혈을 토해낸 것이 아니냐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문이었다. 당시 바로 그가 나서서 제지하였긴 하였으나, 이미 소문은 교황청 안에 퍼질 대로 무성하게 퍼져있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는 수녀에게 말할 순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그녀와 솔직하게 답해주기로 약속하였으나 이것만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입으로 아버지처럼 따랐다 하지 않았다 하였는가. 그런 분의 소천(召天)이. 악마와 계약을 하여 그리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으면, 이 작은 수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게 아니겠습니까."
떨구었던 (-)의 고개가 들려 일라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차분히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걱정 말라는 것처럼, 안심해도 괜찮다는 것처럼. 마치 그리 말해주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녀는 그런 눈 빛에 칼로 찔려 쑤시는것 같던 가슴의 고통이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후에 제가 작성된 서류를 보니 운이 좋게도 한 분께서 성당을 지키고 계시더군요."
"아..,"
"얼마나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수녀님 마저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더는 신부가 배정되지 않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마을에 도움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딱히 칭찬받을 일은 아니었다. 남을 돕고자 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니. 헤럴드 신부님과의 추억이 담긴 이곳을 단지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떠났을 테니까. 수녀는 신부가 자신을 너무나도 높게 평가해 주는 것을 듣고 있자니 그의 진심에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전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헤럴드 신부님과 추억을 만든 이곳을 단지 떠날 수 없었기에 남아있었던 것이니까요."
"그러니 절 높게 평가하여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전 그런 좋은 평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신부는 수녀의 말에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적은 기간이긴 하지만, 1년간 봐온 그녀는 본인 못지않게 마을 사람에게 열심이었다는 걸 알았다.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은 보기 드물었고, 작은 욕심 또한 없었다. 수도에 머무는 수녀들이 가지고 있는 그 흔한 은으로 만든 묵주반지 액세서리조차도 없었다. 신부가 봐온 수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가 본인을 그리도 낮게 평가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수녀님이 말한 것이 큰 걱정거리라고 생각되지도 않고요. 이곳으로 오고 1년간 수녀님께선 충분히도 노력해 주고 있는 모습을 봐왔으니까요.
"··그럼에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노력하시면 됩니다. 주어진 시간은 많으니까요. 충분히 마음이 정리될 겁니다."
가슴속 꺼져있던 불씨가 작게 피어오른 느낌이었다. 수녀는 어쩜 그리 저를 좋게 말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모자란 자신을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다정한 말에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죄의식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신부님께서 배정되었을 때는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무엇보다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었음에도.., 그럼에도 약간의 불안함은 떨굴 수 없었다.
"그리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좀 늦은 게 아닐지 걱정되네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듯합니다. 수녀님께서 힘이 들어 지치신다면 제가 옆에서 도울 테니까요."
"신부님께서 말씀이실까요?"
신부의 말에 수녀가 질문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답했다.
"제가 이 마을에 온 이유는 단순하게도 도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을 이미 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고요. 그러니 저는 제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그리고 제 사람인 분들 중 (-) 수녀님이 언제나 제일 우선순위이십니다. 항상 제 곁에 계셔주시니까요."
눈을 마주치며 제가 우선순위라는 그의 말에 수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얼핏 당연한 말이긴 했다. 신부의 곁에서 보조를 하는 것이 수녀의 의무이니까. 기도 시간이나 개인적인 업무 등 이런 것을 제외하면, 곁에서 떨어질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인데도..,
왜인지 피어오른 불씨가 점점 커져 어딘가 간질 한 느낌을 받았다. 신부님이 사근한 미소를 보여주면서 이런 말을 해주시니 더 그런 것 같았다. 평소에도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신부님의 푸른 벽안을 마주침과, 그의 진심 섞인 다정한 말이 겹쳐. 순간 설렌 평범한 여자의 마음처럼 자신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짧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신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를 의지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수녀님을 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저는 수녀님의 사람과도 다를 게 없으니..,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눈을 부드럽게 휘게 웃으며 신부가 마지막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다시 끔 따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수녀는 부드럽게 부는 바람이 제 가슴을 약하게 계속 두드리기라도 하는 듯. 쉴 새 없이 심장 안쪽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의지와 제사람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워나갔다. 헤럴드 신부님께서 그렇게 되시고, 나이브가 떠난 후. 의지할 곳이 없어져 금이 가버린 제 마음을, 일라이 신부님께서 차차 부서지지 않게 금이 생긴 곳을 메꿔주는 것 같았다.
심장이 왜 이렇게 빠르게 뛰는 걸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이 얼핏 스쳤다. 자신의 심장이 이리도 쉴 새 없이 쿵쿵 거리는 이유는. 한참만에 의지하고 믿을 곳이 생겼다는 기대감과 함께, 신부님을 향한 제 마음에 이성적 호감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 이때부터 조금씩 신부님을 향한 제 마음이 물이 차오르듯 차올랐었다.
⊱ ─────✧❅✟❅✧───── ⊰
툭, 투툭-
수녀는 창밖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후부터 날이 흐려지더니, 예상대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 창문과 부딪혀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천장 쪽으로 돌려 시계를 보았다. 8시 34분..
신부와 식사를 거절하고 들어온 지 대략 30분이 지나있었다. 그녀는 앉아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성당으로 발을 옮겼다.
신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방에서 식사를 하시고 계신 건가 싶었다. 그녀가 다시 나온 이유는, 성당의 문을 걸어 잠그기 위함이었다. 항상 늦은 새벽에 기도를 하는 마을 사람들이 종종 있었기에 혹시 몰라 개방해 두었으며, 변두리에 작은 마을이다 보니 도둑이나 수상한 사람이 없어 성당의 문을 잠그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비가 오는 날에는 혹여라도 산짐승들이 비를 피하려 성당 내부로 들어올지 모르기에.. 위험을 대비하고자 하여 문을 걸어 잠갔다.
문 앞으로 걸어가 잠그려는 찰나, 문밖으로 여러 마리의 말굽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수녀가 귀를 기울이자, 비가 와서인지 소리가 잘 울려 퍼졌다. 이 마을에 말을 가지고 있던 주민은 없었다. 그것도 여러 마리는 더더욱..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밖의 상황이 조금 보일 정도로 문을 열었다. 그사이 빗줄기가 더 거세졌는지 흐릿하지만 저 멀리서부터 말을 탄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저 사람은.."
한눈에 누구인지 수녀는 알아보았다. 2년 전에 신부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 호위를 해주었던 적갈색 머리의 기사였다. 성기사인 제2의 기사단장.. 성함이 케일리온 이었던가..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얼굴은 정확히 기억했으나 이름은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마차와 몇몇의 기사도 보였다.
익숙한 얼굴, 이 어둡고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온 건가 싶어 수녀는 내심 긴장하며 문을 열었다. 빠르게 달려온 말은 어느새 성당 앞에 멈춰 섰다. 2년 전처럼 기사단장이 말에서 뛰어내려 성당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그는 그때처럼 고개를 숙여 반듯하게 인사했다. 언제 봐도 건장한 체구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짧게 고개 숙여 인사 후 기사단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처럼 목이 뻐근했다. 이번엔 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이곳까지 오셨나요?"
"급한 용무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추.., 신부님을 데려오라는 교황님의 전언입니다. 신부님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짧고 간결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꽤나 급급해 보였다. 급한 목소리와 교황의 전언이라는 말에 놀란 수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부를 부르기 위해 그의 방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반질하게 빛나는 갑옷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이 대리석 바닥 위 올려진 레드 카펫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신부를 불러온 수녀는 기사단장과 신부가 나누는 대화를 옆에 서서 들었다. 케일리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러했다. 유티니스 역병으로 의심되는 병이 수도 동쪽 영지에서부터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것.
유티니스 역병이라면 아무리 제국 끝 쪽에 작은 시골마을 사람들이라 해도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역병이었다. 역사서에도 최악의 전염병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는 수녀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30년 전 제국 수도의 인구 40프로의 사람들을 사망하게 한 열병이었다.
고위급 악마가 내린 최악의 전염병으로, 이 병에 전염된 사람들은 몸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열로 인하여 숨을 쉬면 폐를 찌르는듯한 고통으로 이어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신체 부위 끝에서부터 마비되며. 괴사가 진행되다 15일을 넘기지 못하고 무조건 사망하게 되는 병이었다. 당시 수많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총동원되어 전염된 사람들에게서 전염병을 정화시켰으나, 그마저도 신력이 약한 이들은 정화를 진행하다 전염되었고.. 때문에 교황청 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병이 30년 만에 수도에 다시 퍼졌다 생각이 미치니 수녀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눈을 돌려 일라이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의 일부인 옆면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확실히 수녀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항상 지어 보였던 미소와는 다른,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이었다.
"유티니스 역병이 확실히 맞는 겁니까?"
"맞습니다. 수도에 계신 고위 사제님들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발병된 시기는 확인되었습니까? 전염된 사람들의 수는요?"
"발병 시기는 8일 전이며, 전염된 사람들의 수는 250명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확실히 빠르게 전염되고 있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신부의 말에 수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안한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높은 계급일지라도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전염된 사람들을 정화하다 옮게 된다면.. 지금의 신부님마저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재수 없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커져갔다. 세 번이면 족했다. 소중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저를 떠난 것은.
"저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수녀가 같이 가겠음을 말했다. 차라리 같이 가는 것이 제 마음에도 편할 것 같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작은 체구의 수녀에게로 쏠렸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애절한 목소리의 수녀와는 다르게 거절하는 신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저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다. 기껏해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편의를 돕는 것과 신께 하는 기도뿐일 테다. 처음 마주하는 일라이의 단호한 거절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자 주변이 숨 막힐 듯 고요해졌다.
이 기운에 기사단장인 케일리온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하여 밖에서 기다릴 테니 채비를 마치면 나오시라며 성당 밖으로 나섰다. 쿵- 닫히는 문소리가 들리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수녀님도 아시겠지만 유티니스 역병 경우 전염이 쉽게 확산된다고 하죠."
"게다가 고위 악마가 내린 병이기에 정화나 치유도 꽤나 까다로울 겁니다."
신성력이 약한 사람이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건전한 무기 하나 없이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에 뛰어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수녀 또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부와는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구차한 이기심이 들었다.
"미약한 제 신성력이.., 그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도움이 되긴커녕 발목을 잡을 겁니다."
가슴을 강타하는 날카로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일라이는 주먹을 미약하게 쥐었다. 매정하게 들릴 것이다. 도움을 주겠다는 수녀에게 할 말은 아니나, 유티니스 역병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자신도 아직은 모르는 것이기에 쉽사리 허락했다가 전염이 되기라고 하면 안 될 일이었다.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 같이 가겠다는 수녀의 의지를 이런 말이라도 해서 꺾을 수밖에 없었다.
"··제 신성력이 좀 더 높았다면 쓸모가 있었겠죠."
그럼 신부님과도 같이 갈 수 있었을 테고, 혹시 모를 전염될 위험에서 구해낼 수도 있었겠지. 도움 안 되고 쓸모없는 몸. 수녀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마음이 있는 상대에게 들으니 심장이 사무치게 아파왔다. 일그러진 수녀의 얼굴에 신부는 걱정스러움이 일었다.
"··그런 의미로 말은 한건 아닙니다. 말을 심하게 하여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사람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의견은 절대 굽힐 수가 없군요."
이기적인 사람. 제 딴에는 심하게 한 말 때문에 꺼내는 말이겠으나, 과연 본인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말하면 그의 입에서 제 사람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신부는 당연하게도 모르겠지만, 자신에겐 약간은 이기적으로 들렸다. 어이가 없는 건 그럼에도, 제 사람이라는 짧은 단어에 마음이 녹는 것이라는 거다. 문득, 마음이 있는 쪽이 져준다고 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무사히.., 꼭 돌아와 주십시오."
이 말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정말로 아프거나 다치지 말고 건강히 돌아와 달라는 것과, 일이 무사히 끝나게 되었을 때. 그 마지막에 수도에 남는 것을 택하지 않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달라는.. 그런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당연한 말씀을."
신부는 평소의 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에 수녀는 긴장감이 풀리는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녀의 풀린 얼굴을 본 일라이가 손을 목 쪽으로 들어 올려 평소에 차고 있던,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십자가 목걸이를 풀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수녀에게 건넸다.
"다시 돌아오겠음을 약속하겠다는 증거입니다."
"아..,"
그 말에 수녀는 두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건네받았다. 크기는 작았으나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런지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고, 차가웠다.
그것을 약하게 쥐고는 미약하게 웃어 보였다.
"이르면 한 달, 늦더라도 한 달 보름 내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네"
조금은 긴 시간이라 생각했다. (-)은 표정이 다시 굳을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곤 끄덕였다. 신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한 표정이었으나, 생각을 접고 입을 닫았다. ..거세진 빗줄기를 뚫고, 일라이가 마차에 오를 때 즈음이었다. 입술을 벙긋거리는가 싶던 수녀는 거세진 빗소리를 뚫을 정도로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신부님"
신부가 고개를 돌리자 수녀는 사르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습니다 (-) 수녀님."
그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은 기사가 말에 올라타니 기사 단장이 말의 고삐를 잡고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트니 말이 움직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마부와 나머지 기사들도 언덕 아래로 방향을 틀어 내려갔다.
수녀는 점차 사라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며 신부님이 아닌 그의 이름을 불러 드릴 것을 그랬나 생각했다. 뒤늦은 후회감이 몰려들었다. 신부가 이곳에 온 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나, 그녀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신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에게 마음이 생긴 1년 전부터는 더더욱 그러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기도 이상하지만. 그래도 신부님께서는 가끔 수녀라는 말 앞에 이름을 같이 붙여 불러주시곤 했는데, 그런 자신은 정작 너무 정 없게 말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마차가 시선에서 사라지자, 수녀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고는 성당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 ─────✧❅✟❅✧───── ⊰
신부가 수도로 떠난 지도 어느새 3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하늘은 수녀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는 듯. 그 후로 내내 흐린 날씨가 이어졌다. 그사이 비가 온건 아니지만, 그간 우중충한 하늘에 자신의 기분이 괜히 더 가라앉는 것 같았다.
신부가 떠났을 당시는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아 꼬박 하루를 지새웠다. 다행히 이틀째는 잠이 들긴 하였으나, 중간중간 잠을 설쳐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 상황이 지속될 때마다 신부가 건네주고 간 십자가 목걸이를 꼭 쥐고 잠을 청하였다.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니 몸에 피로가 쌓였으나 이건 별일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른다는 것. 3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녀의 체감상 보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하루를 바삐 움직이는데 이리도 시간이 가질 않는다니. 생각보다도 일라이 신부를 향한 제 걱정과 마음이 커다란 것 같아 마음이 간질거렸다.
✧❅✟❅✧
어느덧 저녁이 되고. 홀로 식사를 마친 수녀는 저녁기도를 위해 성배에 성수를 따르고 난 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에 목에 걸려있는 그가 주고 간 십자가를 조심스럽게 쥐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신부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십사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가는 시각이었을까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 기도, 신이 들어주긴 하나?"
어딘가 모를 섬뜩한 느낌에 수녀의 눈이 번뜩 뜨여졌다.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도 없었으며, 하물며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다급히 목소리가 들린 뒤쪽으로 몸을 돌리자 처음 보는 건장한 체구의 검은 머리칼, 새빨간 적안을 가진 남자가 공중에 떠있었다. 성기사와 비슷한 체구의 남자는 흰 셔츠 위 검은 윗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신성력이 약한 자신이 보아도 그는.. 악마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미치자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지. 본인들이 취할 이득이 없으면 듣지도 않을 테지 그들은."
홀로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악마는 점점 더 가까이 얼어붙어있는 수녀에게로 다가왔다. 악마가 신성한 성당 내부에는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이 마을에 어떻게 발을 디딜 수 있는 건가 생각했다. 성당이 마을마다 배치되어 있는 이유도 악마가 신성력으로 발을 디딜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제 앞의 악마는 마을은 뒤로하고 잠시라도 버티기 힘들 성당 내부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유로워 보였다.
신부님이 떠나서. 그래서 그 이유 때문에 신성력이 약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몇 초 만에 머릿속을 빠르게 휘저었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그러자 수녀의 얼굴 앞에 불쑥 얼굴을 내민 악마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뭘 하려고"
움찔. 스산한 목소리가 귀에 가까이 전해지자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수녀는 재빨리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성배를 낚아채 성수를 악마의 몸 위로 뿌렸다. 촤악 소리와 함께 성수가 악마의 얼굴과 몸 위로 젖어들었다. 비명 하나 지르지 않는 악마에 효과가 전혀 없는 건지 망연자실한 마음이 들으려는 순간, 악마의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성수가 맞닿은 피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축성이 담긴 성수는 악한 것을 정화시킨다. 그렇다는 건 웬만한 약한 악마들의 경우, 손쉽게 정화된다는 뜻이었다. 성당에 들어올 정도의 악마이기에 정화까진 바라지 않지만, 살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아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어 보였다. 우선 이 악마에게서 벗어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수가 효과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행히 이제야 제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녀는 저 멀리 성당 문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해서든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문 앞에 수녀가 다다르는 순간, 그녀의 뒷 목덜미가 큰 갈퀴 같은 손에 힘껏 짓눌려졌다.
"끄흑!"
짧은 시간에 거리를 이동한 악마는 수녀의 목덜미를 잡고는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본인보다 한참은 작은 체구를 가진 수녀의 목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잡혔다. 기도가 막혀 숨쉬기가 괴로워지자 수녀는 발버둥 치며 제 목덜미를 잡고 있는 손을 마구 할퀴었다. 발버둥이 약해져가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악마는 제 뒤쪽으로 수녀를 던졌다. 그녀가 레드 카펫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마른 기침을 연신해댔다. 막혀있던 숨구멍이 트이자 카펫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감히. 성수 따위로 같잖지도 않은 장난을 쳐?"
악마는 뻔뜩 뜨여진 눈으로 제 앞에 주저 않아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에 몸이 마비됐다. 도망.., 도망가야 해.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그득 차올랐다. 애초에 수녀는 악마를 만날 일이 지극히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게 악마들은 대부분 사제들이나 성기사들이 해결하니까. 간혹 숙달된 수녀들이 영혼(靈魂)을 보았다는 설은 들어보았으나 악마는 아니었다.
일어서야 했다. 일어서서 도망가야 했다. 수녀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기대고는 일어나려 했으나, 힘이 빠진 손은 애석하게도 자꾸만 일어서 서기도 전에 옆으로 미끄러졌다. 악마는 수녀의 그 모습이, 마치 밟혀 꿈틀거리는 지렁이 같아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넘어진 아기가 홀로 일어서길 기다리는 부모처럼. 수녀가 일어날 때까지 악마는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수녀는 다리가 쉴 새 없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달리면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넘어질게 눈앞에 선했다. 제 앞, 검은 인영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눈물로 인해 흐려진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팔 소매로 눈물을 박박 닦았다. 그 덕에 흐릿했던 악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수녀의 동공이 커졌다. 분명 성수로 인해서 살이 타들어 가는 것을 봤었는데, 수녀의 기억이 왜곡되기라도 한 것처럼 악마의 피부는 깨끗했다. 말도 안 된다는듯한 얼굴로 바라보다 악마와 눈이 마주쳤다. 수녀는 다시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내가 말했잖아? 같잖지도 않은 장난이라고."
딱 보아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은 수녀의 얼굴에 악마는 답해주었다. 그러자 세상 잃은 듯, 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푹 숙인 수녀의 행동은 악마의 웃음을 자아냈다. 방금 전의 일은 그냥 넘어가 줄까 했다. 그나저나.. 저가 가까이에서 본 눈앞의 이 계집은 참 영혼이 맑다고 생각했다. 영혼의 푸른빛이 마치 보석 같아 아름다웠고 탐이 났다. 그 인간보다 더욱. 이리도 탐나는 영혼은 오래간만이었다. 이런 인간은 만나기 쉽지 않은데 의외의 수득이라 생각했다. 악마는 잠시 고민하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네 영혼 좀.. 아니, 많이 탐나네. 그 혼. 나한테 주지 않겠나?"
"..."
입을 닫고 있는 눈앞의 계집의 모습에 악마는 슬슬 짜증이 일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 성당 안엔 이 계집 말고는 다른 인간의 기척은 없었다. 수녀 하나로는 성당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할 터였다. 각 성당엔 주인이 있는 법. 개 혼자서는 무엇 하나 힘들 거였다.
"···이봐. 벙어리인가? 비명은 잘만 질러대던 것 같은데."
"아, 아님 통성명을 하지 않아서 입을 닫고 있는 건가? 어차피 내가 가져갈 혼이니 말해주지. 인간들이 부르는 명칭은 마몬, 실제 이름은 노튼 캠벨이다.
마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수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마몬이라 하면.. 인간의 욕구인 7대 죄악 중 탐욕을 담당하고 있는 고위 악마였다. 왜 그런 악마가 이런 곳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탐욕을 담당하는 악마라 그런지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눈앞에 남자에게 수녀는 어딘가 모를 분노가 일었다.
"···마"
고개를 숙인 얼굴 사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는군. 생각하는데 재차 똑바로 들으라는 듯. 수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웃기지 마. 네까짓 악마한테 줄 영혼은 없으니 좋은 말 할 때 사라져."
수녀는 이 이상 살아남기는 힘들 것을 알았다. 그야, 사제들도 생을 살면서 만나기 어려운, 그것도 7대 죄악을 담당하는 악마이니까. 한편 캠벨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네까짓? 그 말은 캠벨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잔뜩 겁먹을 표정을 지었음에도 할 말은 하는 수녀에게 기가 찼다. 무표정한 얼굴에 금이 가며, 캠벨은 뿌득 이를 갈고는 순식간에 목을 낚아 짓눌렀다. 또다시 숨통이 틀어막히자 수녀는 비음을 토해냈다.
"케, 흑..!"
"혼은 거둬가고, 육체는 갈기 찢어서 마견들의 먹이로 던져주는 게 좋겠군."
악마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에 (-)은 몸이 정처 없이 떨리고 두려웠으나, 마음 한편으로는 일라이 신부님이 지금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혹시라도 있었다면, 저처럼 악마의 손에 영혼을 빼앗긴 죽음을 마주할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신부님이라도 이런 악마는 상대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신부님의 이름을 불러볼걸. 죽는 순간마저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생각하다니 한결같구나.., 이내 목덜미를 잡은 악마의 손목 위로 수녀의 미지근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캠벨은 그것이 개의치 앉다는 듯, 나머지 한쪽 팔을 뻗어 혼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벌렸다.
파아앗-
"큭!"
갑작스러운 빛과, 수녀의 목을 잡고 있는 손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캠벨은 짧은 신음과 함께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풀어 제 쪽으로 당겼다. 시선을 돌려 확인해 보니 손가죽이 벗겨져 있었고, 마비된 것처럼 저릿했다. 성수에 닿는 것과는 확연히. 아니, 그 이상의 전혀 다른 고통이었다. 얼핏, 전에 이 빛과 비슷한 경험을 겪어본 적 있던 것 같았다. 뭐지? 이 기분 나쁜 감각, 언제 적.., 켐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은 이번엔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으나, 목을 잡고 전처럼 기침을 여신 해댔다.
"콜록, 허, 허흑..!"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것이라는 걸 느낀 순간. 신부가 주고 간 십자가 목걸이가 노란빛을 내었다. 그 덕에 제 목을 잡고 놓질 않던 악마가 고통스런 소릴 내며 쉽사리 떨어졌다. 신부님의 신성력이었을까. 빛에서 온도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신부님의 미소처럼 따뜻하게 느껴져 서러운 감정이 복받쳤다. 아직.. 다행히 영혼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다 안심하기도 전, 캠벨이 (-) 옆에 가까이 붙어 다시 수녀의 영혼을 잡아 끌어내리려 했다. 그 순간.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성당 안 내부를 홀로 밝힐 수 있을 정도로 목걸이에서 빛이 반짝였다.

수녀가 너무 환한 빛에 눈을 질끔 감은 순간 번쩍, 강한 빛이 성당 안에 퍼짐과 동시에 캠벨을 강타했다. 그가 성당 문에 큰 소리와 함께 처박혔고, 그 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수녀는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헉..,"
검은 연기가 주저앉은 악마를 감싸고 있었으며, 얼굴에 타격을 입었는지 오른쪽 얼굴을 한쪽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피를 취한 것 같은 그 붉은 동공도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을 감싼 부분은 새처럼 검은 깃털이 생겨있었고, 등에서부터 거대한 검은 날개가 뻗어 나와 있었다. 손톱은 먹잇감을 바로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길게 자라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을 상징하는 악새인 까마귀 같았다.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저것이 저 악마의 본래 모습인 건가 생각했다.
"··그래, 이 빛. 그 재수 없는 놈의 힘과 비슷해."
캠벨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가 갈렸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는데. 이미 저가 죽여버리고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 재가 되어버렸는데. 그 이후로 몇 세기나 지났는데 그런데 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 거냐 왜!!!"
악마가 소리치는 울부짖음에 수녀는 귀가 날카로운 것에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귀를 급히 막고 주저앉았다. 굉장히 날카로운 음성에 성당 내부의 불을 밝혀주고 있던 그 많은 촛불들이 한순간에 훅 꺼져버렸다. 다행히 고통은 잠시뿐이었다. 어두워지고 조용한 성당 내부에 수녀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자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정신줄이 끊어질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 이명 사이로 이성을 잃은 듯, 악마가 홀로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빠르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그 소리에 수녀는 다시 끔 소름이 일었다. 주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행히도 신부님께서 주고 간 목걸이가 저를 지켜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것만 있으면 저 악마는 제 영혼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손으로 십자가를 꼬옥 쥐고 저 멀리 주저앉아 있는 악마에게 수녀는 목멘 음성을 힘들게 쥐어짜냈다.
"··돌아가"
"그리고 이곳에 다시는 오지 마..!!"
이성이 반쯤 날아간 캠벨이 수녀의 소리침에 고개를 번뜩 들며 그녀 쪽으로 달려들자, 다시 한번 목걸이에서 이전과 같은 빛이 일렁였다. 빛이 다시 번쩍이자 짐승이 위험한 것을 피하는 것 마냥, 거대한 날개로 몸을 웅크리며 분노한 듯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비명을 내지르자 귀를 바로 막아버리고 눈을 질끔 감았다. 캠벨은 문밖으로 튕겨지듯 사라졌다.
크게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 지난 뒤에야 수녀는 다시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악마가 휩쓸고 지나간 성당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그 틈으로 외부의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수녀는 고요한 정적에 몰린 피로감이 쏠려 힘없이 카펫 위로 쓰러졌다. 몸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도 없었다. 여파로 인하여 온몸이 쿡쿡 쑤셨다. 눈동자를 힘없이 굴리니 시선에 목걸이가 들어왔다. 아직도 옅게 빛을 내고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이내 눈물이 뺨을 타고 옆으로 흘러 카펫 위로 스며들었다.
".. 흐윽.. 읏..,"
남이 함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두려움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서러웠고,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죽어서도 부모님과 헤럴드 신부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두려웠던 것은.. 다시는 신부님의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것.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신부님께서 주신 목걸이가 아니었음 진작에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겼을 거라 생각하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손을 겨우 질질 끌어 목걸이를 쥐었다. 그리고 제 입술에 짧게 지분거리고는 떼어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빛이 사르륵 꺼졌다.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안도감과 피로감에 수녀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마침내 찾아온 휴식이었다.
✧❅✟❅✧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있었다. 단정한 수녀복을 입은 (-)은 이곳이 무슨 공간인지 궁금했다. 아마 꿈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공간은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서늘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니 다리가 찌뿌둥해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을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계속해서 걸었다.
끝이 보일 기미가 없었다. 걷기만 하자니 이것도 질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도대체 끝은 어디인 것일까 생각하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서럽게 우는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나 다시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저의 부모님.. 수녀의 부모는 왜인지 모르게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꿈이라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수녀는 그쪽으로 한 발 두발 빠르게 걸어가다 이내 달렸다.
"어, 엄마 아빠..!!"
부모님의 인영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땅이 훅 꺼졌다. 이내 바다 심연 깊숙한 곳으로 빠진 것 같이 몸이 가라앉았다. 탈출하고자 몸을 발버둥 처보았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숨이 가빠지고 몸이 무거웠다.
차차 부모님의 모습이 시야에서 흐려지고, 수녀는 깊은 심연 어딘가로 빠져들었다.
"···헉!!"
수녀의 눈이 번쩍 뜨여짐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수녀가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보니 해가 뜨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들어왔다. 시각은 이른 새벽이었다. 두터운 레트카펫 위에서 일어난 것을 보니 어제의 일은 꿈이 아니라는 듯 비웃는 것 같았다. 수녀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꿈 내용이 너무나도 뒤숭숭해 기분이 찝찝했다.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자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은 서둘러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게 왜.."
수녀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지쳐 쓰러지기 전만 해도 멀쩡했던 십자가 목걸이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어제의 일 때문인 건가 생각했다. 어제 악마의 힘으로 무리가 되어 부러진 것인지 신성력의 힘이 다해 부러진 것인지 정확히 알길은 없었다.
다만 부러졌기에 이제는 어제처럼 신성력을 발휘할 수 없단 것은 알았다. 제 혼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언제 악마가 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악마의 눈빛이 생각나자 몸이 바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도망갈까 생각하였으나 생각을 금세 접어두었다.
이곳을 떠나면 갈 곳이 없을뿐더러, 헤럴드 신부님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차마 매정하게 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일라이 신부님께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시기로 하였으니까. 힘든 일을 마치시고 돌아왔을 텅 빈 공간을 마주하게 되면 그 심정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바보라고 해도 좋다. 미련하고 멍청하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괜찮았다.
이기적인 마음은 이미 녹아들 대로 녹아들었는걸.. 비록 어제의 일을 또 겪을까 두려움이 머릿속에 그득 채워졌으나 어제의 악마가 당한 상처를 보아하니 바로 치유되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당한 게 있기에 이곳에 안 돌아오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수밖엔 없었다.
수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어제의 여파로 성당의 문이 열려 있었다. 밖의 상태를 보니 3일간 흐렸던 날씨와는 다르게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수녀는 부디 쾌청해진 날처럼 다시는 악마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두 동강 나버린 십자가를 꼭 쥐었다.
✧❅✟❅✧
다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조용히 흘렀다. 다행히 악마가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나,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그 덕에 중간중간 잠에서 깨기를 반복하고 어떨 때는 잠에서 깬 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홀로 저녁기도를 하는 게 겁이 났다. 그래도 그나마 부러진 십자가 목걸이라도 목에 걸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하루 일과가 바삐 움직여져서 다행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루 종일 악마가 다시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만 할 것이 뻔했으니.., 어이없게도 신부님을 생각하던 초반과는 다르게 그 날로 인하여 악마가 쳐들어 올까 불안감의 연속이었다. 신부님께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수도에는 결코 데려갈 수 없다는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표정이 굳어졌다. 저를 걱정해 일부로 매정하게 한 말임을 아는데도..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렸다. 그 이후에 좋은 말도 해주셨는데 왜 하필 자꾸만 낮은 음성으로 말한 그 말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건지. 답답함에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
캠벨이 본래의 이성을 찾은 건 꼬박 하루 뒤였다. 인간들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산꼭대기의 깊은 동굴에서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순간부터 캠벨의 몸 주변에서 꺼림직한 검은 파동이 작게 일렁였다.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그 빛의 여파로 인한 상처는 수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즉에 아물었으나, 타격을 제일 크게 받은 오른쪽 얼굴은 이상하게도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다. 흉터를 없애기 위해 몇 번이나 얼굴의 가죽을 뜯어내었으나, 빠르게 재생한 새로운 살점에서조차 흉터가 남아있었다. 몇 번을 반복하여도 같은 결과에 속이 들끓어올라 두꺼운 목과 팔뚝에 푸릇푸릇 한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마냥 꿈틀거렸다.
"..그 빛."
붉은 적안이 번뜩였다. 캠벨이 분노에 이기지 못해 벽면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강한 타격 음과 함께 딱딱한 돌덩어리가 쩌억 갈라졌다. 저가 신보다 그토록 싫어하고, 역겨워 하던 자의 신성력과 비슷했다. 그렇게 투명하고도 강한 빛을 내뿜는 건 그자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그 수녀 따위가 그런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그자가 그 계집으로 환생 한 것이렸다? 아니, 그럴 리는 절대 만무했다. 자신이 그자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난 후. 부활이나 환생이 불가하도록 육체와 혼을 분리시켜 육체는 뼛가루도 남지 않도록 태워버렸으며, 혼의 경우 갈기갈기 찢어버려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신의 얼굴이 문드러지는 꼴이 볼만했으니, 환생이나 부활의 가능성은 만무했다.
힘이 비슷하여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그 수녀는 왜 그리도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수녀라는 직책이 그리도 강한 신력을 가질 순 없었다. 벽에 처박힌 팔을 떼자 파스스 가루가 된 모래알이 떨어졌다. 고위 악마의 경우, 인간과의 신체 접촉이 되었을 경우에 그 사람의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캠벨은 뗀 손을 가볍게 주먹을 쥐며 눈을 감았다. 이미 그 수녀의 목덜미를 잡고 난 뒤었으니, 집중만 하면 그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캠벨이 머리에 집중을 가하자 서서히 수녀의 기억과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상태로 5분간의 시각이 지났다.
"허,"
기가 차단 듯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캠벨이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 빛의 힘은 수녀의 기억에 있는 신부의 신성력이었다. 악마가 터무니없단 표정으로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제 것이라 표식을 해두었군."
하는 짓거리가 너무 나도 하찮았다. 신이 알면 한탄하겠군그래. 그렇게 한참을 웃느라 들썩이던 어깨가 갑자기 뚝, 끊겼다. 금세 무표정해진 자신의 오른쪽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울퉁불퉁한 얼굴 가죽의 촉감이 느껴졌다. 까뒤집은 눈으로 먼 허공을 쳐다보던 캠벨은, 제 얼굴을 이리 만들어 버린 두 인간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했다. 짧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생각을 끝마친 캠벨은 한쪽 입꼬리을 올려 비죽 웃어 보였다.
"··일러도 한 달."
충분한 시간임을 직감한 캠벨의 웃음은 꽤나 비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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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몬이라는 악마는 7대 죄악 중 탐욕을 담당하는 악마로 확인돼서 탐사원이랑 너무 찰떡궁합이길래 바로 넣음.. 마몬이라는 악마가 새의 머리 두 개 달렸다 하길래.. 좀 미화를 시켜서 머리 하나 달린 까마귀로 바꾸었다는ㅋㅋ
비하인드
원래 용병 넣을 생각 없었는데 다 써놓고 용감자 넣으면 재밌겠다 싶어서 처음부터 스토리 추가해서 썼다.. 진심 그래놓고 후회함 오질라게 힘들어서.. 결과는 만족하지만 과거의 나를 너무 때리고 싶었음.
1편이 짱 길었죠..? 한번 읽어보는데 한시간 넘게 걸렸어요...ㅋㅋㅋㅋ

네.. 글자 수가 6만이 넘습니다..ㅋㅋㅋㅋ 저 진챠 힘들었어요 흑흑..
그래도.. 다음 편은 제가 너무나도 쓰고 싶었던
R-18이기에 신납니다. 야호 ^!^
1편을 제외한 나머지 편들은 전부 다 R-18입니다!!
고로 다음 편은 성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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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인증만 하면 된답니다. ღ'ᴗ'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