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제5인격×(-)소설

너를 다시 만나기까지 ver. 본문

일반 글

너를 다시 만나기까지 ver.

귬델리 2022. 10. 23. 03:38

"권태기 온 거 아니야?"


맞은편에 앉은 캠벨의 입에서 나온 답이었다. 엎드린 몸을 일으키고는 나는 술이 가득 담긴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한 보 금 마시자 쓴 소주의 맛이 혀를 감겼다. 인상 찌푸리며 금방 잔을 비워냈다.


"몰라···"

"적당히 마셔. 너 혼자 지금 두병 거진 다 마신 건 아냐?"


캠벨이 잔에 술을 따르는 내 손목을 붙잡고는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이내 나는 신경질을 내며 저지당한 손목을 빼냈다. 따르다 만 술잔에 마저 술을 따르고 병을 내려두는 것을 본 캠벨이 한숨을 깊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안줏거리 없이 빈속에 술만 들이켜 속이 좋지 않자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냥 헤어져라 뭔 감정 소비를 하고 있냐?"

"닥쳐.. 니가 뭘 안다고."

"난 적어도 너 새끼처럼 속앓이는 하지 않거든."


헤어지라는 말에 욱해 내 입에서 욕이 흘러나오자 캠벨도 지지 않고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헤어지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는지 쉽게도 내뱉어 낸다.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초에 이런 속앓이를 하는 이유도 어느 날 갑자기 서서히 변한 애인 때문이었다. 같을 대학을 진학하고, 나의 자취방에 같이 동거를 하고 있는 항상 지켜주고 싶은 작은 체구의 소중한 애인. 너무나도 사랑하는 (-).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변했다. 언제부터였더라? 꽤 오래되었는데. 그래 맞다, 3개월 전서부터였다. 극 초반엔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지 어두워졌을 때가 있었으나 그건 삼사일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평소의 (-)으로 돌아왔니까. 다만 그때부터.. 그때부터 그녀는 점점 변해갔다. 그녀는 원래 자신의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 가녀린 체구로 어쩌다 한 번씩 늦잠을 잤으며, 그 흔한 휴강한 번 한 적 없이 밤늦게 코피를 쏟아가며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시간도 모자를 테인데 대학 등록금을 낼 알바도 구멍 없이 꾸준히 다니며, 심성이 곱고 따뜻해 다른 이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애인이었다. 그랬던 그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다니던 알바를 그만두고, 자취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외출하는 시간이 교양수업을 들으러 갈 때뿐이었으나 요 근래 들어선 교양 수업도 무단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아둔 돈으로 그간 가지고 싶어 했던 옷이나 게임기를 사기 시작했다. 점점 변하는 그녀를 보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야 사랑하니까. 그저 열심히 사는 것에 지쳐 잠시 내려두었구나 싶었으니까.. 오히려 응원을 했으면 했지 그녀를 원망한 적은 없다. 이것 때문이라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을거다. 내게 제일 큰 고민은 (-)이 이따끔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는 있는데, 그게 심각하게 표정이 굳은 채였다. 얼굴에 티를 내진 않았으나 그런 것에 눈썰미가 좋은 나였다. 고민을 들어주고 싶어 왜 그러냐 물어보아도 그냥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내가 알바를 끝내고 늦은 시간 자취방을 들어왔을 때었다. 이때는 손님이 없어 사장이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을 끝내주었을 때. 자취방에 들어온 순간 난 놀랐다. 바닥에 주저앉아 서글프게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을 보고는 신발을 벗을 시간도 없이 달려가 안아주며 왜 그런 지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한결같이 들려오는 늘 똑같은 대답은 하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은 지치는 법이다. 이 짓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몇 달을 시달리다가 결국 (-)과 사소하거나 크게 다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들려준 적은 없었다. 대체.. 왜. 어떤 고민이길래 답을 말해주지 않는 걸까. 나는 네 애인이잖아. 나에겐 의지하고 싶단 생각 따윈 들지 않는 거야? 내 표정이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캠벨 저 자식 말대로 (-)이 권태기인 걸까. 헤어지고 싶은데 따로 말을 꺼내지 못해 (-) 너도 답답한 걸까.


"··술맛 떨어진다. 나 간다."


*┈┈┈


"나 왔어"


대답은 돌려오지 않는다. 걸음을 옮겨 그녀가 있을 침대로 걸어갔다.


"뭐 하고 있어?"

"아, 나이브 왔어..?"

"응"


노트북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노트북에 눈길을 주며 말하자 (-)은 들킬세라 서둘러 노트북을 닫았다. 대체 뭐길래. 헤어지는 방법이라도 검색을 한 걸까. 난 티 나지 않게 눈을 찌푸렸다.


"맞다 나이브. 나 2인용 제주도 여행권 끊어뒀어."

"뭐? 갑자기?"

"응 꼭 가보고 싶어서. 다음 주 주말 티켓이야 같이··"

"왜 그걸 내 의사도 묻지 않고 결정한 건데?"


(-)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적이 없던 내가 말을 잘라내고 묻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빈속으로 마셨던 술이 이제야 취기가 올랐다. 취기가 오른 만큼 감정도 제어가 안됐다. 원래 같았으면 좋게 말할 대답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듯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서두르듯 나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잡힌 손은 따뜻했다.


"미안, 말도 없이 끊어서 당황했지.. 화났어..?"

"..."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자 곧 입술을 앙 다물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슬슬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티켓 말고 다른 것 때문에 화난 거야? 말해줘. 말해주면 내가 고칠게.."

"아니? 화 안 났어. 내가 화낼 이유가 뭐가 있겠어."


말과 말투가 매치되지 않는다. 말을 툭툭 내뱉으면서 무엇이 화가 나질 않았단 건지. 내가 화가 나지 않았다 말하자 (-)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잖아. 나이브 너 지금 화난 거야. 내가 그걸 모르겠어? 그니까 말해줘."

"왜, 답답해? 솔직히 내가 왜 이러는지는 (-)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넌 답답하기만 하겠지만 난 답답하다 못해 죽을 거 같아."

"··설마.., 아직도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했잖아."


"··난!"


그놈의 신경 쓸 필요 없단 소리 치가 떨리다 못해 짜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소리치자 (-)의 몸이 흠칫 굳었다. 취기가 오른 행동 때문에 내가 이러는 걸까? 아니, 그간 한 겹 한 겹 쌓인 일이 천천히 가열한 열로 인해 결국 참다못해 깨져버린 유리처럼 나온 행동이었다.


"네 남자친구야. 애인이라고. 고민 같은 건 언제든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위로해 줄 사람."

"···"

"근데 네 행동은 어땠어? 뭐만 하면 별일 아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대체 어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가 서럽게 울어대는데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인가 보다 넘어갈 수 있는데?"

"아니면 네 눈에는 내가 전혀 믿음이 가질 않는 애인이었어? 그래서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거야?"

"무슨,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잡힌 손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속절없이 떨려왔다. 떨리는 손을 잠시 내려다 본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아, 그래. 아님 캠벨 녀석의 말처럼 권태기라도 온 거야? 내가 이젠 싫어졌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말해. 그 말 못 한 고민이 대체 뭔지. 말 못 해주겠으면 나도 더 이상 지치니까 우리 그만하자."


그만하자는 말에 (-)의 동공이 떨렸다. 마음 한편으론, 내가 이렇게도 감정 제어를 못하는 인간인가 싶었다. 욱해서 나온 말이었으나 더 이상은 지쳤다. 솔직히 말해 너무나도 지쳐 이젠 그녀를 붙잡고 제발 말해달라고 빌고 싶을 지경이었다. 말을 해주지 않으니 난 더 이상 그녀에겐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아서, 고민을 공유하지 못하는 벽이 세워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쏘아붙이지 않으면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내 마음 한편에선 나를 놓지 말아 달라, 제발 너에게 날 기댈 수 있는 존재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해달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냉담했다.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에선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그래.. 그게 좋겠다. 우리 헤어지자."


*┈┈┈┈


그 후로 몇 달간은 사람같이 지낸 것 같진 않다. 슬슬 모든 게 귀찮아졌다 싶을 때쯤 제멋대로 자취방에 들이닥쳐 내 멱살을 끌어잡은 캠벨 녀석의 덕에 그나마 제정신을 차리곤 요즘에서야 다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은 내 옆에 더 이상 없었다. 그녀가 생각날만한 물건도 이 자취방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나가기 전 자신의 물건만을 챙겨 나갔거니와, 캠벨이 선뜻 나서지 못한 나를 대신해 그나마 남아있던 그녀의 물건까지 싹 다 치워버렸으니까. 차마 어딘가 후련하단 듯 말을 한 그녀를 더 이상 붙잡을 용기 따윈 내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건 생각보다 가슴이 더욱 아려왔기에.


"아."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자신의 발끝에 걸리는 소포. 이것 하나만 빼고 말이다. (-)은 헤어짐을 선언하고 난 뒤 그다음 날 바로 자취방을 떠났다. 그리고 이 소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내가 주문한 것이 아니니 당연히 그녀가 주문한 것이었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누가 훔쳐 가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 둔 건데. 자취방이 대학로 근처이기에 누가 훔쳐 가도 모를 텐데도 불구하고 늦여름에 온 소포가 초겨울이 오는 시기인데도 먼지만 쌓인 채 그대로 복도에 나뒹굴려 져 있었다. 그렇다면 버려버리면 끝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난 그냥 신경을 꺼버렸다.


*┈┈┈┈


쉴 틈 없이 바쁜 과제, 시험들에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나올 때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스팸 번호로 의심 가는 번호는 아니었기에, 동기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하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기.. 나 기억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난 휴대폰을 떼고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에 이름이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난 뒤 다시 귀로 휴대폰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신데요?"

"···"

"말 없으면 끊습니다."

"나.. (-) 친구.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

스멀스멀 기억이 났다. (-)과 초등학교 동창인 사람.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만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소개해 준 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제는 나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 전화를 한 걸까. 솔직히 달갑지는 않았다.


"무슨 볼일로 전화한 건데?"


자리를 옮긴 나는 대학교 안 흡연구역에 도착했다. (-)과 사귈 당시 싫어하는 그녀를 위해 금연했었다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불을 붙이고 입에 대었다. 한 보 금 마시고 내뱉자 공기 중으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했다.


"(-)과 헤어졌어. 솔직히 왜 전화한 건진 모르겠거든."

"···(-)의 일 때문이야.. 꼭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만날 수 있을까?"


난 눈썹을 찌푸렸다. 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단 건지. 이미 헤어지고도 몇 달이나 지난 상태에서, 그것도 전 애인의 친구가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에 대한 할 말이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미 끝낸 인연이다. 냉담하게 저를 잘라내 상처를 준 건 그녀였다. 아직 한참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긴 후 쓰레기통에 던지며 딱딱하게 말했다.


"난 할 말 없어."

"제발! 딱 한 번만.. 더 이상 부탁하지 않을게, 안 그럼 (-)이 가 너무 안쓰럽단 말이야.."


전화 너머 목소리는 애절하고 다급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길래 말 끝에 (-)이 가 안쓰럽다는 소리를 하는 건지. 안쓰러운 존재는 솔직히 나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목소리 톤을 보아하니 이대로라면 대학까지 찾아올 것 같았다. 질질 끄는 것보단 그냥 빨리 끝내버리자 싶었다.

*┈┈┈┈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난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를 빼내곤 맞은편에 앉았다. 음료는 시키지 않았다. 빠르게 끝내라는 의미였다.
서로 인사는 없었다. 솔직히 정접 없는 관계에 웃으며 인사하는 건 웃기지 않은가. 그것도 전 여자친구의 친구와. 내가 빨리 말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침을 꼴깍 삼키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이 대학 자퇴한 거 알고 있어?"

"아니."


알리가 없었다. 같은 대학이나 비록 전공은 달랐으니까. 게다가 그토록 원하던 대학을 그 애가 자퇴할리 없으니까. 좋은 성적이었으며 그렇게나 노력을 했던 그녀였는데. 난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의 친구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눈을 깔고 내려다보니 하나는 종이가 반으로 찢어져 테이프로 이어붙여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구겨진 상태였고, 하나는 주소가 적혀져 있는 종이었다. 내가 이게 무엇이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입을 열었다.


"··하나는 (-)이가 너에게 남겨둔 편지야. 원래는 보낼 생각이 없었는지 찢어서 구겨버린 걸 내가 따로 붙여둔 거야. 그리고 또 하나는.."


*┈┈┈┈


난 그 자리를 벅차고 나왔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었다. 급하게 택시 정류장으로 한참을 뛰어 도착했다. 차오르는 숨을 뒤로하고 애석하게 지나가는 차들을 하나 둘 바라보다가 겨우 택시를 잡았다. 하나는 주소가 적혀져 있는 종이였다. 그 주소지의 종점은 납골당이었다. (-)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는 장소였다. 주소지가 적힌 종이가 손의 힘에 의해 볼품없이 구겨진다. 내 손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렸다. 진정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으나, 소용없는 짓이란 게 느껴져 이를 물었다.


"폐 섬유증이었어.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심란한 와중에도 카페에서 대화한 얘기를 머리로 더듬었다. 폐 섬유증.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며, 증상이 악화될수록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병. 그런 병을 대체 언제부터..?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 머리를 부여잡았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


그 시기는 내가 처음 그녀에게서 이상 징조를 느꼈을 때다. 그리고 3개월 뒤에 우린 헤어졌다. 이제야 이상했던 틀이 하나씩 맞춰졌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 식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내 마음이 아니었나 보다. 이리도 반응하는 걸 보면 난 그녀를 잊지 못한 게 맞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력감과 서글픈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다. 지치는 건 그녀였을거다. 그런데도.. 왜 생각을 못 했을까. 평소에는 건강하던 그녀이기에 병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무엇보다 젊은 나이인데 더욱 그럴 거란 가능성을 아예 빼두었다. 등신 같은 놈.

납골당에 도착해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빠른 눈대중으로 안치되어 있는 이들의 사진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러다 제일 구석진 곳에서 그녀의 사진일지도 모르는 것을 발견했다. 숨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발에 족쇄라도 묶인 양 그녀에게 다가가는 발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솔직히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거짓말인 줄 알았다. 마음 한편으론 아니길 바랐다. 이곳에 그녀가 없는 것을 보고 그녀의 친구에겐 다신 이딴 장난치지 말라고 크게 화를 내려고 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저절로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한 걸음이 끝나기 전에 잔디 위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사진이 보였다.

난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 않았다. 손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쿵쿵 거리는 맥박 소리가 귀에 전달되는 게 잘 느껴졌다. 점점 가쁜 숨에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대자, 손가락 사이로 미지근한 게 묻었다. 손을 떼고 그것을 바라보자 투명한 물이었다. 아, 그래. 난 지금 울고 있었다. (-)이 더 이상 이곳에 없다는 걸 결국 인정해 버린구나.


"하.. 하하.."


물이 섞인 꽤나 멍청한 웃음소리다. 점점 표정이 구겨진다. 흐려지는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환한 그녀의 미소가 담긴 사진밖엔 보이지 않았다. 왜 나에겐 끝까지 말해주지 않은 건지. 그렇게도 너에게 나라는 존재는 기댈만한 가치가 없었던 인간인지. 결국엔 나를 이리도 나쁜 새끼로 만들고 가는 이유가 대체 뭐인 건지. (-)에게 복잡한 심정이 끓어올랐다.


"나를 바보로 만들고 간 너를 원망하기를 바라는 거야?"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헤어진 걸까. (-)을 향한 심정은 분노에서 곧 걱정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너를 이리도 외롭게 만든 걸까. 그곳은 따뜻한 걸까. 지금은 겨울인데, 넌 무척이나 춥고 외로운 것을 싫어했다. 마지막에 홀로 떠난 네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와 숨이 턱턱 막혔다. 끅끅거리면서 내가 울 자격이나 있을까. 너는 나보다 훨씬 괴롭고 힘들었을 텐데 고작 나 같은 게 이렇게 슬퍼해도 괜찮은 걸까. 모르겠다. 감정이 제어가 안된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걸 난 막지 못했다.


*┈┈┈┈


멍하니 자리에 서서 사진과 유골함을 바라본지 얼마나 지났을지 모르겠다.
눈물은 그쳤으나 머릿속은 멍했다. 다른 고객들이 방문해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소리에 그나마 정신을 차린 나는 마른 세수를 했다. 손에 스친 눈가가 쓰리다. 손을 떼고 창문으로 바라본 하늘은 노을이 가득 차 들어있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휴대폰보다 먼저 걸리는 게 있었다. (-)이 나에게 남기려 했다는 편지. 난 그것을 꺼내 펼쳐보았다. 구겨지고 테이프로 붙인 종이를 펼치자 대략 서너 줄 정도가 적힌 글이 보였다. 도중엔 무엇으로 인해 잉크가 번진 건지 글씨가 흐린 것도 부분부분 보였다.


「날이 점점 쌀쌀해지고 있어. 나이브 넌 따뜻하게 지내고 있을까? 잘은 모르겠다만 난 네가 잘 지내고 있길 바라.

나는.. 잘 모르겠다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이걸 쓴 당시의 너는 어땠을까. 많이 아프진 않았을까.

「···그렇게 헤어지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니 네가 나에게 섭섭한 건 당연하더라.」

당연히 섭섭했다. 그리고 지금도 섭섭하다. 나를 조금 더 의지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마음 상해있진 않았으면 해. 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거든. 넌 나에겐 터무니없이 좋고,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단지 내가 속이 좁은 놈이었기에 당시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넌 나를 걱정해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던 거겠지.


「네가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어. 고맙고 사랑해.. 너무 보고 싶어."」


".. 나도 보고 싶어."


이제는 너에겐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그리고 마주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네가 없다는 진실을 알고 나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너로 인해 시간이 멈췄는데 애석하게도 세상은 하루가 바쁘게 굴러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너는 다른 사람에게서 천천히 잊혀 가겠지. 머릿속에서 천천히 갈피가 잡힌다. 하지만 난 잊지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나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잊더라도 나 하나만은 널 잊지 않을게. 사랑스러운 미소, 난감한 표정, 울고 화내던 모든 표정 하나하나를 내 가슴속에 담아둘게. 마음이 단단히 굳어진다. 납골당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유골함과 그녀의 사진을 보았다.


"··너를 꼭 만나러 갈게. 그러니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줘."


그녀에게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순간에 본 그녀의 사진은 노을빛에 환하게 빛났다. 그것이 왜인지 모르게 잘 가라고, 다음에 또 보자는 배웅 같아 가슴이 시큰 거렸다.


*┈┈┈┈


난 집 앞에 뒹굴어져 있는 소포를 집으로 가지고 들어와 침대를 등지고 앉았다. 배달 날짜를 보자 (-)이 말한 제주도 여행 날짜 전에 온 것이었다.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포장을 뜯고, 꺼내어 펼쳐보자 새하얀 긴 원피스가 사르르 흘러내렸다. 마치 드레스 같은 느낌이다. 제주도에 가면 입으려고 했던 거겠지. 그러진 못했다만..,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다에서 이 원피스를 입고 해변가를 걷는 그녀를 생각하니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라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이미 늦은 것을 안다. 난 옷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제 유일하게 하나 남은 그녀의 유품이었다. 이곳엔 그녀가 사용하던 장식품, 신발, 컵 등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옷에 얼굴을 파묻으니 피곤함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보일 리 없는 그녀가 내 앞에 앉아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이건 환상이다. 달콤한 환상. 다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역시나 앞은 텅 비어있었다. 너무나도 공허했다. 그러나 너에게 사랑한다고 전할 수만 있다면 환상이든 꿈이든 무엇이든 좋다.


"사랑해.., 사랑해 (-)."


그녀를 만나면 이 말을 꼭 전해줄 거다. 내 중얼거림은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역시 글은 삘받을 때 후다닥 써야 합니다!!!
나이브 시점으로 단편 글 하나 쪄왔답니다 요즘 왜 이리 피폐가 좋은지 ㅎㅎ

꽃떨수를 기다리시는 분께는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멈춰있던 진도가 조금씩 나가고 있답니다.


그럼 제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오는 그날까지~ 날이 추우니 다들 몸 조리 잘 하세요!

Comments